전체 글 2198

무늬들 - 이병률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서나 때아닌 눈사태가 나고 몇심 갑자를 돌고 도느라 저 중심에서 마른 몸으로 온 우글우글한 미동이여 그 아름다움에 패한 얼굴, 당신의 얼굴들 그리하여 제몸을 향해 깊숙이 꽃은 긴 칼들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이 덮였다 놓였다 풀어진즌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감성충만 시 2021.08.28

등뒤의 사랑 - 오인태

앞만 보고 걸어왔다 걷다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고개를 돌리자 저만치 걸어가는 사람의 항얀 등이 보였다 아, 그는 내 등뒤에서 얼마나 많은 날을 흐느껴 울었던 것일까 그 수척한 등줄기에 상수리 나무였는지 혹은 자작나무 였는지 잎들의 그림자가 눈물 자국처럼 얼룩졌다 내가 이렇게 터무니 없는 사랑을 좇아 끝도 보이지 않는 숲길을 앞만 보며 걸어올때 이따근 머리위를 서늘하게 덮으며 내가 좇던 사랑의 환영으로 어른거렸던 그 어두운 그림자는 그의 슬픔의 그늘이었을까 때로는 발목을 적시며 걾음을 무겁게 하던 그것은 그의 눈물이었을까 그럴 때마다 모든 숲이 파르르 떨며 흐느끼던 그것은 무너지는 오열이었을까 미안하다 내 등뒤의 사랑 끝내 내가 좇던 사랑은 보이지 않고 이렇게 문득 오던 길을 되돌아보게 ..

감성충만 시 2021.08.18

바오밥나무 에서

사랑이 털이 많이 자라서 커트를 해야한다 오늘 할일은 사랑이 커트하고 내머리도 커트하고 사랑이 커트를 기다리면서 가까운 바오밥 나무에 책 한권 가지고 가서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사랑이 미용실을 가는 길에 담쟁이 덩굴이 이쁜 곳이다 옆에 자라는 메타세콰이어 나무의 울창함도 좋치만 난 특히 이 담장이 덩쿨이 우거진 이길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작년에 보도 블럭을 다시 깔면서 그 우거진 담쟁이 덩굴을 모두 잘라버렸었다 너무 안타까웠다 참으로 멋진 길이였는데 .... 그런데 올해 담쟁이 덩굴이 담장넘머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담장 너머에 있던 담쟁이 덩굴이 담장을 넘어서 내려온것이다 물론 뿌리가 죽지 않고 살아서 그 뿌리위로 새순이 난것도 많이 있어서 다시금 이 여름 푸르름을 선사하고 있는것이다 언젠가 사랑이를 앉..

나의 하루 2021.08.09

세월은 빨리도 간다

오늘이 입추다. 정년을 마치고 시작한 야간 전담반 일이 벌써 반년도 지나고 뜨거운 여름의 한중심에 서있다 절기는 벌써 입추라고 한다. 그래서 그럴까 새벽 공기를 마시며 쓰레기 버리려 가는길에 마주한 바람의 느낌은 서늘하다. 아무리 힘썬 장사 한낮의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도 한주만 지나면 서늘한 가을바람과 한층 높아진 하늘의 구름이 될것이다. 오면은 갈것이고 가면은 다시 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것 같다. 얼마전 작은애는 집 문제로 맘졸이는 일이 있었다 전세집 주인이 막무가내로 다음에 들어올 전세 계약자 하고 계약을 파기 하겠다고 우기는 통에 전세 보증금을 제때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길까봐 우리 가족은 모두 일주일동안 전전긍긍 했었다. 다행히 마음이 변한 주인집 할아버지가 그대로 계약을 유지 시킨다는 중대 결..

나의 하루 2021.08.09

뼈아픈 후회 -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러놓고 가는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하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군데는 부서진채 모두 떠났다 내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이 벌곃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누구를 위해 그누구를 한번..

감성충만 시 2021.08.07

내가 아침마다 걷는 길 - 이호준

내가 아침마다 걷는 건 길이 아니라 시간이다 하루살이의 짧은 생을 함께 걷는 것이다 잠에서 깬 나비의 첫 날개짓을 걷는 것이다 멧비둘기의 목쉰 노래를 걷는 것이다 느리게 흐르는 강물의 옛이야기를 걷는 것이다 저기 저 노인의 등굽은 날들을 걷는 것이다 오늘 죽은 이의 마지막 아침을 걷는 것이다 오늘도 이쪽의 시간을 지고 저쪽으로 걸어간다 죽는 날까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감성충만 시 2021.08.05

고맙다고 속삭여 봅니다 - 정외숙

들판에 여기저기 피어있는 꽃들이 너무나 작고 예뼈서 고마워 고마워 내가 너를 볼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속삭여봅니다 내가 보고파서 창 밖을 내다보기를 여러 날 언제쯤 볼 수 있을지 묻고 싶었지만 너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었지 따뜻한 바람이 너의 소식을 싣고 왔다는 반가운 마음에 맨발로 집 앞으로 달려 나왔지 또다시 찾아와 주어서 고마워 고마워

감성충만 시 2021.08.02

여름밭 - 문태준

여름에는 한두 평 여름밭을 키운다 재는것 없이 막행막식하고 살고 싶을 때가 있지 그때 내 마음에도 한두 평 여름밭이 생겨난다 그냥 둬보자는 것이다 고구마순은 내 발목보다는 조금 높고 토란은 넓은 그늘아래 호색한처럼 그 짓으로 알을 만들고 참외는 장대비를 꽉 물어삼켜 아랫배가 곪고 억센 풀잎들은 숫돌에 막 갈아 나온 낫처럼 스으스윽 허공의 네 팔다리를 끊어놓고 흙에 사는 벌레들은 구멍에서 굼실거리고 저들마다 일꾼이고 저들마다 살림이고 저들마다 막행막식하는 그런 밭날이 무명빛으로 잘 들어 내귀는 밝고 눈은 맑다 그러니 그냥 더 둬보자는 것이다

감성충만 시 2021.08.02

폐가를 지나며 - 이형곤

범어사 남방 길 옆 지금은 사라진 청룡동 옛 마을 터 금방이라도 푹석 주저앉을 것 같은 뼈도 살도 이미 수명을 다한 임종 직전의 폐가 한 채 언제부터인가 들고양이 가족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스산하고 음침한 폐가지만 예전엔 한 가족이 슬어낸 추억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그리운 고향집 이리라 폐가 아직도 누구를 기다리는가 문이란 문은 죄다 열어두고 등굽은 용마루엔 제멋대로 자란 와송이 뽀족하게 내려보고 있다 누군가 돌아와 아궁이에 군불 지펴주길 기다리는가 작은 마당엔 찬물로 막 씻은 듯한 메꽃 몇 송이 입술 파랗게 올려다 본다

감성충만 시 2021.08.01

말밤나무 아래서 - 공광규

나는 이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알죠 바람을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소리가 뭐야?" 라고 물었을 때 " 당신 수다야" 라고 대답했던 사람이죠 아침 햇살 살결과 이른 봄 체온 백자엉덩이와 옥잠화 성교 줄장미 생리하혈과 석양의 붉은 볼 뭉봉선 입술과 대지의 살 냄새를 가진 사람이죠 나는 이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알죠 바람을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 죽음이 뭐야 ?" 라고 물었을때 간결하게 " 당신을 못 보는 것이지 " 라고 대답했던 사람이죠 나는 이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알죠 바람이 보내는 사람이 눈군지 말밤나무 몸통과 말밤 눈망울 말밤나무 손가락을 가진 사람이죠

감성충만 시 2021.08.01

잃어버린 문장 - 공광규

푸장나무 향기가 풋풋한 마당 쑥대를 태우며 말대방석에서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별과 별을 이어가며 썼던 문장이 뭐였더라 한 점 한 점 보석으로 박아주던 문장 어머니의 콧노래를 받아 적던 별의 문장 푸장나무도 없고 쑥대도 없어 밀대 방석을 만들던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 무릎마저 없어 하늘공책을 펼칠 수도 읽을 수도 없는 문장 별과 별을 이어가던 문장이 뭐였더라 한 점 한 점 보석으로 박아주던 그 문장이 ....

감성충만 시 2021.08.01

얼굴 반찬 -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입 반찬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서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감성충만 시 2021.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