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충만 시 503

유월의 독서 - 박준

그림자가 먼저 달려드는 산자락 아래 집에는 대낮에도 불을 끄지 못하는 여자가 살고 여자의 눈 밑에 난 작고 새카만 점에서 나도 한 일 년은 살았다 여럿이 같이 앉아 울 수도 있을 너른 마당이 있던 집 나는 그곳에서 유월이 오도록 꽃잎 같은 책장만 넘겼다 침략과 주름과 유목과 노을의 페이지마다 침을 묻혔다 저녁이 되면 그 집의 불빛은 여자의 눈 밑 점처럼 돋아나고 새로 자란 명아주 잎들 위로 웃비가 내리다 가기도 했다 먼 능선 위를 나는 새들도 저 눈 속 가득찬 물기들을 그빛을 보며 말려갔겠다 책장을 덮어도 눈이 자꾸 부시던 유월이었다

감성충만 시 2023.06.11

청매화 - 박규리

다른 길은 없었는가 청매화 꽃잎 속살을 찢고 봄날도 하얗게 일어섰다 그 꽃잎보다 푸르고 눈부신 스물세살 청춘 오늘 짧게 올려 깍은 머리에서 아직 빛나는데 네가 좋아하는 씨드니의 푸른바다도 인사동 네거리의 생맥주짐도 그대로다 그사람 떠나고 다시 꽃핀 자리마저 용서했다더니 청매화 꽃잎 꿈결처럼 날리는, 오늘 채 여물지도 않는 솜털들을 야무지게 털어내다니 정말 다른 길 없었더냐 새벽이면 동학사로 떠날 이른 봄 푸른 이끼 같은 아이야 여벌로 장만한 안경과 흰 고무신 한 켤레 머리맡에 챙겨놓고 잠든 너의 죄 없는 꿈을 마지막으로 쳐다보다 눈부시도록 추울 앞날을 위해 이 봄날, 떨리는 손으로 두툼한 겨울 내복 두벌 가방 깊숙이 몰래 넣었다 이른 봄 푸른 이끼 같은 아이야 이 봄날 꽃길처럼 부디 그대의 앞길도 눈이 ..

감성충만 시 2023.05.29

잘지내고 있어요 - 목필균

그리움은 문득문득 잘 지내고 있어요 ? 안부를 묻게 한다 물음표를 붙이며 안부를 묻는 말 메아리 없는 그리움이다 사랑은 어둠 속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 안부를 전하게 한다 온점을 찍으며 안부를 전하는 말 주소 없는 사랑이다 안부가 궁금한 것인지 안부를 전하고 싶은지 문득 문득 잘지내고 있어요 ? 묻고 싶다가 잘지내고 있어요 전하고 싶다

감성충만 시 2023.05.29

한 호흡 - 문태준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고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우고 피어난 꽃은 한 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 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고 부르자 꽃나무 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 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 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호흡 이라 부르자

감성충만 시 2023.05.29

광양여자 2 - 이대흠

쓸쓸함이 노을 든 억새꽃 같은 여자와 살고 싶었네 쭈구러지기 시작한 피부에 물고기 눈처럼 순한 눈망울을 끔벅거리는 여자 산죽처럼 서걱거리는 연애로 청춘을 다 탕진하고 세상 밖으로 가는 길을 손목에 새기려 했던 여자 나는 맹감잎 같은 귀로 그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어쩌지 못한 가시가 그녀를 다치게 하였네 사랑한다 말하면 밤 뜸들일때의 숯불처럼 자분자분 끓어오르는 여자 그여자를 생각하면 분홍이나 노랑이라는 단어가 떠올라서 외풍 심한 겨울밤에도 마음 한쪽에 아랫목이 생겼네 연두 뚝뚝 떨어질 듯 연한 감잎처럼 순한 귀를 가진 여자 그여자와 어느 산 아래 흙집 지어 살림차리고 찰방거리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주고 소꼴을 베러 새벽이슬 깨뜨리며 바지게 지고 들로 나가리 익은 낫질에 후딱 오른 한 바지게 풀짐에선..

감성충만 시 2023.05.28

법정 스님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시간의 잔고에는 노소가 따로 없습니다 남은 시간은 아무도 모르고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어요 시간 앞에서는 누구나 공평하지요 행복의 척도는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예요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느냐에 있습니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죠 사람의 얼굴을 가리켜 삶의 이력서라 하죠 아름다운 얼굴을 갖고 싶다면 겉모습을 고칠게 아니라 안으로 예뼈지는 업을 익혀야 해요 진실은 진실된 사람에게만 투자하세요 그래야 좋은 결실을 맺습니다 아무에게나 나의 진심을 투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에요 저마다 자기 몫의 삶, 자기 그릇이 있어요 자기 그릇에 자기 삶을 채워가며 살아가는 게 우리가 말하는 인생입니다 눈앞의 장애를 회피하지 마세요 회피하고 싶..

감성충만 시 2023.02.22

소금문자 - 신새벽

바다의 영혼들이 유서를 써놓았나 아득하게 넓은 소금 호수 나의 눈은 재빠르게 수평선의 끝자락을 잡으려 했지만 놓치고 만다 마치 이승과 저승의 건널목에 미아가 되어버린 듯 몽롱한 현기증에 휘청거린다 빗금을 그으며 달려오는 햇살이 눈을 찌르고 초점을 잃어 바닥을 향하지만 유서의 문장은 읽을 수가 없다 바람의 살점이 떨어지고 해의 갈비뼈가 으스러져 만든 흰 뼛가루 같은 소금밭 무디었던 발바닥에 사각의 귀가 분질러지는 아픔 해체되어지는 문자들이 발가락 사이로 끼어들어 채 아물지도 않은 상처로 쓰리다 왈칵 옆구리에 달라붙어 있던 슬픔이 목울대를 건드린다 소금 낱장의 빈칸이 얊은 물사이를 일렁이고 당신과의 행간이 아득해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슬프도록 짜디 짠 문장을 읽으려 눈을 부빈다

감성충만 시 2022.09.29

목숨 -1 [김훈]

행복에 대한 추억은 별것 없다 다만 나날들이 무사하기를 빈다 무사한 날들이 쌓여서 행복이 되든지 불행이 되든지, 그저 하루하루가 별 탈 없기를 바란다 순하게 세월이 흘러서 또 그렇게 순하게 세월이 끝나기를 바란다. 죽을 생각 하면 아직은 두렵다 죽으면 우리들의 사랑이나 열정도 모두 소별하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삶은 살아있는 동안만의 삶일 뿐이다. 죽어서 소멸하는 사랑과 열정이 어째서 살아있는 동안의 삶을 들볶아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사랑과 열정으로 더불어 하루하루가 무사할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은 아니지만 그래도 복 받은 일이다.

감성충만 시 2022.03.02

이인휘 작가님의 페이스북 글

얼마전 내가 잘가는 박남준 시인의 카페에서 예전 시인이 사시던 집의 사진을 보면서 뭉클 했는데... 난 이런 쓰러져가는 집을 보면 마치 내마음 같아 웬지 슬퍼지고 울쩍해진다. 그런데 이 사진과 관련된 글이 이인휘 작가님 페이스북에 올라왔다. 글을 읽으면서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이 마구마구 .... 감히 소원해본다 이글이 너무 감동적이여서 회원분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감히 용기내어 올립니다. 겨울비가 외롭게 온다. 문득 며칠 전 한 시인이 올려놓은 그의 옛집 사진이 떠올랐다 .1993년쯤 신자유주의 물결이 휘몰아치던 그때 나는 궁핍했고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만 했다. 그래서 잘 팔릴수있는 소재로 글을 썼고 25일만에 오만권을 팔리자 온갖 텔레비젼에서 출연 요청이 쇄도했다. 늘 노동과 사회문제에 ..

감성충만 시 2021.12.04

슬픔이 기쁨에게 -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있는 할머니에게 굴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국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덜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때 자마니 한 장조차 덜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감성충만 시 2021.10.27

작은 별이지만 빛나고 있어 - 책속의 한줄

겁도 없이 외로움은 나이와 비례하게 커졌고 아픔은 견딜수록 깊어졌으며 사랑은 이름이 무색할 만큼 고독만 안겨주었다 어떤 것이든 알아갈수록 어려워졌다 완전함을 추구 할수록 불완전한 삶이 나를 옥죄었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수록 나의 부족함이 탄로 날까 두려웠다 세상은 무엇 하나 쉬운게 없었고 삶은 하나도 그냥 흘러가지 않았다 이제 조금은 안다 누구와 사랑해도 고독할 것이고 무언가 알아가도 부족할 것이며 모든것을 배워도 모자람에 좌절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끊임없이 사랑을 찾고 부족함을 채우려 들고 더 배우려 할것이다 검도 없이

감성충만 시 2021.10.27

밥 - 장석주

귀 떨어진 개다리 소반위에 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 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 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 한그릇의 더운 밥을 얻기 위하여 나는 몇번이나 죄를 짓고 몇번이나 자신을 속였는가 밥 한 그릇의 사슬에 매달려 있는 목숨 나는 굽히고 싶지 않은 머리를 조아리고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이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발을 들여놓고 잡고 싶지 않은 손을 잡고 정작 해야 할 말을 숨겼으며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했으며 잡고 싶은 손을 잡지 못했다 나는 왜 밥을 먹는가 오늘 다시 생각하며 내가 마땅히 지켰어야 할 약속과 내가 마땅히 했어야 할 양심의 말들을 파기하고 또는 목구멍 속에 가두고 그 대가로 받았던 몇 번의 끼니에 대하여 부끄러워한다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아아 나는 가롯 유다가 되지 않기 위하여 기도..

감성충만 시 2021.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