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충만 시 503

가을밤 - 이기철

나는 나뭇잎 지는 가을밤을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때로 슬픔이 묻어있지만 슬픔은 나를 추억의 정거장으로 데리고 가는 힘이 있다 나는 가을밤 으스름의 목화밭을 사랑한다 목화밭에 가서, 참다참다 끝내 참을수 없어 터뜨린 울음 같은 목화송이를 바라보며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것임을 생각하고,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보드랍고 이쁜 것임을 생각하고 토끼보다 더 사랑스러운 그 야들야들한 목화송이를 만지며 만지며 내가 까아만 어둠 속으로 잠기어 가던 가을 저녁을 사랑한다 그 땐 머리 위에 일찍 뜬 별이 돋고 먼 산 오리나무 숲속에선 비들기가 구구구 울었다 이미 마굿간에 든 소와 마당귀에 서 있는 염소를 또 나는 사랑한다 나락을 실어 나르느라 발톱이 찢겨진 소, 거친 풀, 센 여물에도 좋아라 다가서던 어둠 속에..

감성충만 시 2021.02.07

여행에서 남는 장사는 인연장사다 - 신광철

인생을 이리 허비하며 살아도 되는가 싶다가도 몇 권의 책을 내고는 이만하면 됐지, 하며 위로한다. 인생을 굳이 더 살 이ㅠ가 있나 싶다가도 시 몇 편 써놓고는 그래도 살만하지 위로한다 허파에 바람 들어 여행을 따닌디. 배낭 하나 울러매고 떠나는 여행이지만 배낭엔 실속 있는 것 하나 없다. 글로 사니 책은 지겹다. 시인으로 가난하게 살았으니 등기 안 된 땅과 그리고 바다를 팔아먹으며 떠돌란다. 음악이 좋지만 시도 때도 없이 지저귀는 새소리로 대신 할란다. 바람 한 줄기 끌어안고 길바닥에 누워 잠들어도 좋고, 푸른 머리 풀어헤친 나무에 기대 바람과 간지럼 태우며 놀아도 좋지만 그래도 여행에서 남는 장사는 사람장사다. 사람과의 인연장사다. 길 잃은 사람 하나 만나 서로 위로해도 좋다 마음을 닫은 여인을 만나면..

감성충만 시 2021.02.05

청매화 - 박규리

사진출처 카스에서 다른길은 없었는가 청매화 꽃잎 속살을 찢고 봄날도 하얗게 일어섰다 그 꽃잎보다 푸르고 눈부신 스물세상 청춘 오늘 짧게 올려 깎은 머리에서 아직 빛나는데 네가 좋아하는 씨드니의 푸른 바다도 인사동 네거리의 생맥주집도 그대로다 그사람 떠나고 다시 꽃 핀 자리마저 용서했다더니 청매화 꽃잎 꿈결처럼 날리는, 오늘 채 여물지도 않은 솜털들을 야무지게 털어내다니 정말 다른 길 없었느냐 새벽이면 동학사로 떠날 이른 봄 푸른 이끼 같은 아이야 여벌로 더 장만한 안경과 흰 고무신 한 켤래 머리맡에 챙겨놓고 잠든 너의 죄 없는 꿈을 마지막으로 쳐다보다 눈부시도록 추울 앞날을 위해 이 봄날, 떨리는 손으로 두툼한 겨울 내복 두벌 가방 깊숙이 몰래 넣었다

감성충만 시 2021.02.03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 이외수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한 그루의 나무를 보라 바람 부는 날에는 바람 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 ​ 꽃 피는 날이 있다면 ​ 어찌 꽃 지는 날이 없으랴 ​ 온 세상을 뒤집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밤에도 소망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달빛을 건지더라 ​ 더러는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와 일기장 갈피마다 눈이 내리고 참담한 사랑마저 소식이 두절되더라 ​ ​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침묵으로 세월의 깊은 강을 건너가는 한 그루의 나무를 보라 [출처] 임은정 검사 애송시 |작성자 동탄남자

감성충만 시 2021.01.30

겨울 숲에서 - 안도현

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 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무들도 모두 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 그대를 사랑하는 동안 내마음 속 헛된 욕심이며 보잘 것 없는 지식들을 내 삶의 골짜기에 퍼붓기 시작하는 저 숫눈밭 속에다 띠뜻한 아궁이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 내가 들어가야 할 길도 지워지고 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 빈 겨울 나무들의 숲으로 그대 올 때는 천지사방 가슴 벅찬 폭설로 오십시오 그때까지 내 할 일은 머리 끝까지 눈사람이 되어 눈을 뒤집어쓰고 서..

감성충만 시 2021.01.28

그릇 - 안도현

사기 그릇 같은데 백 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그릇을 하나 얻었다 국을 담아 밥상에 올리 수도 없어서 둘레에 가만 입술을 대보았다 나는 둘레를 얻었고 그릇은 나를 얻었다 그릇에는 자질한 빗금들이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었다 빗금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 버릴수 없는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맹세했다

감성충만 시 2021.01.28

눈 오는 지도 - 윤동주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힌다 방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훌훌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든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나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이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감성충만 시 2021.01.24

넥타이를 맨 담벼락을 만났다 - 이제우

낯선 곳, 낯선 골목에서 왠지 모르게 따뜻하게 마음을 불러 세우는 담벼락을 본다 비틀거리며 살아 온 나의 넋두리를 손사레 치지 않고 다 들어줄 것 같은 담벼락을 보고 덕지덕지 감추며 살아 온 나의 슬픔도 가만히 다 닦아줄 것 같은 담벼락을 본다 약간은 시골스러운 넥타이에 투박한 색상의 외투를 걸친 채 구멍난 가슴을 안고 서 있는 나를 닮은 담벼락을 본다 금방 쓰러져도 이상할 것 하나 없을 것 같은 지친 모습이지만 오랜 세월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고 선 구멍난 가슴의 담벼락을 본다 낯선 곳, 낯선 골목길에서 만난 투박한 담벼락, 구멍난 가슴에 대고 가만히 속삭여 본다 참 수고 했다고, 참으로 고맙다고 .....

감성충만 시 2021.01.24

겨울나기 - 도종환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주고 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 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얼고 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힜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감성충만 시 2021.01.24

너도 그러냐 - 나태주

나는 너 때문에 산다 밥을 먹어도 얼른 밥 먹고 너를 만나러 가야지 그러고 잠을 자도 얼른 날이 새어 너를 만나러 가야지 그런다 네가 곁에 있을 때는 왜 이리 시간이 빨리 가나 안타깝고 네가 없을 때는 왜 이리 시간이 더딘가 다시 안타깝다 멀리 길을 떠나도 너를 생각하며 떠나고 돌아올 때도 너를 생각하며 돌아온다 오늘도 나의 하루에는 너 때문에 떴다가 너 때문에 지는 해이다 너도 나처럼 그러냐 ?

감성충만 시 2021.01.24

부석사 - 유평

산 첩첩 위태로운 사랑 데리고 끊어졌다 이어진 산짐승 발자국 따라 다시 눈 첩첩 그 속에 갇혀 헤매다 이따금 울리는 범종 소리에 다행히 빈 절집은 아닌 것 같다며 궁극에는 우리 사랑도 저럴 수만 있다면 당신이 말씀하셨던가요, 내게 종각에 말없이 앉아 먼 데 눈 길 주다 가만히 흔들리는 것이 당신 어깨만은 아니어서 헝클어진 머릿결 사이로 설핏 스쳐 보이던 물기가 언 볼을 타고 흘러 내리기도 하던 것이였습니다 그 침묵의 깊이가 참으로 무량도 하였습니다 바람 첩첩 끝내 아무 답도 주질 못하고 돌아 나오다 올려다 본 절집 아 이름마저 위태로이 뜨인 돌이라니

감성충만 시 2021.01.24

무심한 바람은 그렇게 떠나만 가고 - 김단

한낮의 시간이 어둠에 먹혀버린 시간 팬플루트의 도와 레의 음계처럼 오늘 따라 읊조리듯 달빛 부딪히는 창가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는 이질적인 마법의 전주곡처럼 들려온다 뀅한 분위기 탓일까 떠난자의 흔적은 길게 뻗은 철로 속으로 사라진 채 밤 기차는 그렇게 떠나가 버렸다 떠남 뒤에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잊혀야 할 인연에 대한 보복의 수단이리라 가로등이 삼킨 그림자의 턱 밑에선 슬픈 손짓이 머물고 있는데 점점 더 지워져 가는 그리움에 대한 진상은 식어가는 심장의 가장자리를 짓밟고 흐르는 시간의 팬턴마저도 잊게 만들어 버렸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버려 무엇을 기다렸는지조차 그것조차도 잊게 만들었으니까 기차는 바람의 읊조림난 싣고 달리고 길게 뻗은 철로 위엔 설디설운 노랫소리만 점점 멀리 사라져간다 "간..

감성충만 시 2021.01.24

겨울 편지 - 안도현

눈발이 대숲을 오랏줄로 묶는 줄도 모르고 술만 마셨다 거진 지금도 눈 오니 여긴 가까스로 그쳤다 저 구이 들판이 뼜속까지 다 들여다 보인다 댓잎 위에 눈 쌓이는 동안 나는 술만 마셨다 청둥오리는 청둥오리 발자국을 찍으려고 왁자하게 내려앉고 족제비는 족제비 발자국을 찍으려고 논둑 밑에서 까맣게 눈을 뜨고 바람은 바람의 발자국을 찍으러 왔다가 저 저수지를 건너갔을 것이다 담배가 떨어져 가게에 갔다 오느라 이 세상에 와서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것을 땅바닥에 삑고 다니느라 신발은 곤해서 툇마루 아래 잠들었구나 상기도 눈가에 물기 질금거리면서 눈 그친 아침은 그래서 이새상 아닌 곳에다 대고 자꾸 묻고 싶어진다 넌 괜찮니 ? 넌 괜찮니 ?

감성충만 시 2021.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