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충만 시 503

나무들은 때로 붉은 입술로 말한다 - 이기철

사랑하는 시간만 생이 아니다 고뇌하고 분노하는 시간도 끞ㅎ는 생이다 기다림만이 제 몫인 집들은 서 있고 뜨락에는 주인의 마음만한 꽃들이 뾰루치처럼 붉게 핀다 날아간 새들아 어서 돌아오너라 이 세상 먼저 살고 간 사람들의 안부는 이따 묻기로 하고 오늘 아침 쌀 씻는 사람의 안부부터 물어야지 햇빛이 우리의 마음을 배추잎처럼 비출때 사람들은 푸른 벌레처럼 지붕 아래서 잠쌘다 아무리 작게 산 사람의 일생이라도 한 줄로 요약되는 삶은 없다 그걸 아는 물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흘러간다 반딧불 만한 꿈들이 문패 아래서 잠드는 내일이면 이세상에 주소가 없을 사람들 너무 큰 희망은 슬픔이 된다 못 만난 내일이 등 뒤에서 또 어깨를 툭친다 생은 결코 수사가 아니다 고통도 번뇌도 힘껏 껴안는 것이 생이다 나무들은 때로 붉..

감성충만 시 2020.11.20

한호흡 - 문태준

꽃이 피고 지는 그사이를 한호흡이라 부르자 재몸을 올려 꽃을 피우고 피어난 꽃은 한 번 더 올려 꽃잎을 떨어뜨러 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 에게도 별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 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실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감성충만 시 2020.09.26

강물의 일 - 허연

사람의 일에도 눈물이 나지 않는데 강물의 일에는 눈물이 난다 사람들이 강물을 보고 기겁을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총구를 떠난 총알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강물은 어떤 것과도 몸을 섞지만 어떤 것에도 지분을 주지 않는다 고백을 듣는 대신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강물의 그일은 오늘도 계속된다 강물은 상처가 많아서 아름답고 또 강물은 고질적으로 무심해서 아름답다 강물은 여전히 여름날이 되시의 대세다 인간은 어떤 강물 앞에서도 정직하지 않다 인간은 어떤 강물도 속인다 전쟁터를 누비던 강에게 도시는 비겁하다 사람들은 강에게 무엇을 물어보든 답을 들을 수는 없다 답해줄 강물은 이미 흘러가버렸기 때문이다 빠르게 흘러가버리는 일 여름날 강이 하는 일

감성충만 시 2020.08.26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 허연

불빛이 누구를 위해 타고 있다는 설은 철없는 음유시인들의 장난이다 불빛은 그저 자기가 타고 있을 뿐이다 불빛이 내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내가 불빛이었던 적이 있는가 가끔씩 누군가 니 대신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내 대신 지하도를 건너지도 않고 대학병원 복도를 서성이지디도 않고 잡지를 뒤적이지도 않을 것이라는 걸 그 사실이 겨울날 새벽보다도 시원한 순간이 있다 직립 이후 중력과 싸워온 나에게 남겨진 고독이라는 거 그게 정말 다행인 순간이 있다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이지 않는다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다시 밖으로 나갈자다 세찬 빗줄기가 무엇하나 비켜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남겨놓은 것을 본적이 있는가 그 비가 나에게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있었던가 나를 용서한 적이..

감성충만 시 2020.08.26

나는 아직도 - 박재삼

나는 아직도 꽃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찬란한 노래를 하고 싶습니다만 저 새처럼은 구슬을 굴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놀빛 물 드는 마음으로 빛나는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만 저 단풍잎처럼은 아리아리 고울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빈손을 드는 마음으로 부신 햇빛을 가리고 싶습니다만 저 나무처럼은 마른 채로 섰을 수가 없습니다 아,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을 따름 무엇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감성충만 시 2020.08.26

햇빛의 선물 - 박재삼

시방 어릿여릿한 햇빛이 골고루 은혜롭게 한ㄹ에서 땅으로 내리고 있는데 따져보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무궁무진한 값진 이 선물을 그대에게 드리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건만 내가 바치기 전에 그데는 벌써 그것을 받고 있는데 어쩔수가 없구나 다만 그 좋은 것을 받고도 그저 그렇거니 잘모르고 있으니 이 답답함을 어디 가서 말할 거나

감성충만 시 2020.08.26

너를 기다리는 동안 ㅡ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서성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댜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설레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 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서성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넌에게 가고 있다

감성충만 시 2020.07.04

바닷가에 대하여 ㅡ 정호승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땨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깨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 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기 둑 위에서 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 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 자기만의 바닷가로 달려가 쓰러지는 게 좋다

감성충만 시 2020.07.04

다시 , 평사리 ㅡ 최영욱

야윈 곳간이 늘 문제였다 비우면 언젠가는 채워질 거라는 말은 꽃이 피면 다시 올 거라는 말처럼 헛된 것이라서 쓸쓸했다 날이 저물면 저녁이 찾아들 듯 날이 새면 어김없이 오르던 평사리 - 행 늙은 자동차도 길을 다 외워 차도 나도 편안했던 평사리 행 ㅡ 이십여 년 이젠 늙어 기다릴 사람도, 받을 기별도 더는 없어 빈 곳간들을 사람으로, 문장으로 채워놓고 내 언젠가는 최참판댁 솟을 대문을 등뒤로 두고 개치나루 쯤에서 나룻배 하나 얻어타고 흐르듯 떠나가겠지 나는 늘 평사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렸지만 이제 평사리가 나를 기다려도 좋치 않을까 싶은 곳이다 평사리 - 출

감성충만 시 2020.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