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충만 시 503

무늬들 - 이병률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서나 때아닌 눈사태가 나고 몇심 갑자를 돌고 도느라 저 중심에서 마른 몸으로 온 우글우글한 미동이여 그 아름다움에 패한 얼굴, 당신의 얼굴들 그리하여 제몸을 향해 깊숙이 꽃은 긴 칼들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이 덮였다 놓였다 풀어진즌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감성충만 시 2021.08.28

등뒤의 사랑 - 오인태

앞만 보고 걸어왔다 걷다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고개를 돌리자 저만치 걸어가는 사람의 항얀 등이 보였다 아, 그는 내 등뒤에서 얼마나 많은 날을 흐느껴 울었던 것일까 그 수척한 등줄기에 상수리 나무였는지 혹은 자작나무 였는지 잎들의 그림자가 눈물 자국처럼 얼룩졌다 내가 이렇게 터무니 없는 사랑을 좇아 끝도 보이지 않는 숲길을 앞만 보며 걸어올때 이따근 머리위를 서늘하게 덮으며 내가 좇던 사랑의 환영으로 어른거렸던 그 어두운 그림자는 그의 슬픔의 그늘이었을까 때로는 발목을 적시며 걾음을 무겁게 하던 그것은 그의 눈물이었을까 그럴 때마다 모든 숲이 파르르 떨며 흐느끼던 그것은 무너지는 오열이었을까 미안하다 내 등뒤의 사랑 끝내 내가 좇던 사랑은 보이지 않고 이렇게 문득 오던 길을 되돌아보게 ..

감성충만 시 2021.08.18

뼈아픈 후회 -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러놓고 가는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하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군데는 부서진채 모두 떠났다 내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이 벌곃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누구를 위해 그누구를 한번..

감성충만 시 2021.08.07

내가 아침마다 걷는 길 - 이호준

내가 아침마다 걷는 건 길이 아니라 시간이다 하루살이의 짧은 생을 함께 걷는 것이다 잠에서 깬 나비의 첫 날개짓을 걷는 것이다 멧비둘기의 목쉰 노래를 걷는 것이다 느리게 흐르는 강물의 옛이야기를 걷는 것이다 저기 저 노인의 등굽은 날들을 걷는 것이다 오늘 죽은 이의 마지막 아침을 걷는 것이다 오늘도 이쪽의 시간을 지고 저쪽으로 걸어간다 죽는 날까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감성충만 시 2021.08.05

고맙다고 속삭여 봅니다 - 정외숙

들판에 여기저기 피어있는 꽃들이 너무나 작고 예뼈서 고마워 고마워 내가 너를 볼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속삭여봅니다 내가 보고파서 창 밖을 내다보기를 여러 날 언제쯤 볼 수 있을지 묻고 싶었지만 너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었지 따뜻한 바람이 너의 소식을 싣고 왔다는 반가운 마음에 맨발로 집 앞으로 달려 나왔지 또다시 찾아와 주어서 고마워 고마워

감성충만 시 2021.08.02

여름밭 - 문태준

여름에는 한두 평 여름밭을 키운다 재는것 없이 막행막식하고 살고 싶을 때가 있지 그때 내 마음에도 한두 평 여름밭이 생겨난다 그냥 둬보자는 것이다 고구마순은 내 발목보다는 조금 높고 토란은 넓은 그늘아래 호색한처럼 그 짓으로 알을 만들고 참외는 장대비를 꽉 물어삼켜 아랫배가 곪고 억센 풀잎들은 숫돌에 막 갈아 나온 낫처럼 스으스윽 허공의 네 팔다리를 끊어놓고 흙에 사는 벌레들은 구멍에서 굼실거리고 저들마다 일꾼이고 저들마다 살림이고 저들마다 막행막식하는 그런 밭날이 무명빛으로 잘 들어 내귀는 밝고 눈은 맑다 그러니 그냥 더 둬보자는 것이다

감성충만 시 2021.08.02

폐가를 지나며 - 이형곤

범어사 남방 길 옆 지금은 사라진 청룡동 옛 마을 터 금방이라도 푹석 주저앉을 것 같은 뼈도 살도 이미 수명을 다한 임종 직전의 폐가 한 채 언제부터인가 들고양이 가족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스산하고 음침한 폐가지만 예전엔 한 가족이 슬어낸 추억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그리운 고향집 이리라 폐가 아직도 누구를 기다리는가 문이란 문은 죄다 열어두고 등굽은 용마루엔 제멋대로 자란 와송이 뽀족하게 내려보고 있다 누군가 돌아와 아궁이에 군불 지펴주길 기다리는가 작은 마당엔 찬물로 막 씻은 듯한 메꽃 몇 송이 입술 파랗게 올려다 본다

감성충만 시 2021.08.01

말밤나무 아래서 - 공광규

나는 이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알죠 바람을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소리가 뭐야?" 라고 물었을 때 " 당신 수다야" 라고 대답했던 사람이죠 아침 햇살 살결과 이른 봄 체온 백자엉덩이와 옥잠화 성교 줄장미 생리하혈과 석양의 붉은 볼 뭉봉선 입술과 대지의 살 냄새를 가진 사람이죠 나는 이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알죠 바람을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 죽음이 뭐야 ?" 라고 물었을때 간결하게 " 당신을 못 보는 것이지 " 라고 대답했던 사람이죠 나는 이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알죠 바람이 보내는 사람이 눈군지 말밤나무 몸통과 말밤 눈망울 말밤나무 손가락을 가진 사람이죠

감성충만 시 2021.08.01

잃어버린 문장 - 공광규

푸장나무 향기가 풋풋한 마당 쑥대를 태우며 말대방석에서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별과 별을 이어가며 썼던 문장이 뭐였더라 한 점 한 점 보석으로 박아주던 문장 어머니의 콧노래를 받아 적던 별의 문장 푸장나무도 없고 쑥대도 없어 밀대 방석을 만들던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 무릎마저 없어 하늘공책을 펼칠 수도 읽을 수도 없는 문장 별과 별을 이어가던 문장이 뭐였더라 한 점 한 점 보석으로 박아주던 그 문장이 ....

감성충만 시 2021.08.01

얼굴 반찬 -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입 반찬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서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감성충만 시 2021.08.01

작은 연가 - 김정만

사랑이여, 보아라 ㄲㅎㅊ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질녘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다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유수와 같이 흐르는 별이 보인다 우리도 별 하나 얻어서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눈 밝히고 가다가다 밤이 와 우리가 마지막 어둠이 되면 바람도 풀도 땅에 눕고 사랑아, 그러면 저 초롱은 누가 끄리,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우리가 하나의 어둠이 되어 꽃초롱 앞세우고 가야 한다면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눈 밝히고 눈 밝히고 가야 한다면.

감성충만 시 2021.08.01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당신 ....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슾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갈래 그리고 함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디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치요. 내가 ..

감성충만 시 2021.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