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충만 시 503

내가 살아 보니까 - 장영희

내가 살아 보니까 사람들은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남을 쳐다볼 때는 부러워서든 불쌍해서든 그저 호기심이나 구경 차원을 넘지 않는다 내가 살아 보니까 정말이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 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 이라는 것이다 명품 핸드백에서도 사시한 잡동사니가 가득 들었을 수 있고 비닐봉지에도 금덩어리가 담겨 있을 수 있다 내가 살아 보니까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를 남과 비교 한다는 것이 얼마나 시간 낭비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깍아 내리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 줄 알겠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 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다 어차피 세월은 흐르고 지구에 중력이 존재하는 한 몸은 쭈글쭈글 ..

감성충만 시 2021.01.11

인생 - 조미하

괴로워서 술을 마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파서 하염없이 걷는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상처의 깊이가 다르지만 스스로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 지혜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내 아픔과 고통이 가장 큰 걸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혼자만의 고통속에 허우적 거리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문득 누군가에 가슴에 박혀있는 더 커다란 상처를 봤을 때입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 누구나 외로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표현하지 않을 뿐 누구나 고통을 당하고 살아갑니다 좋은 일만 있을 수 없고 슬픈 일만 있을 수 없는 그것이 바로 삶이고 그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내 인생의 봄날은 오늘 중에서

감성충만 시 2021.01.11

와온 바다 - 곽재구

해는 이곳에 와서 쉰다 전생과 후생 최초의 휴식이다 당신의 슬픈 이야기는 언제나 나의 이야기다 구부정한 허리의 인간이 개펄 위를 기어와 낡고 해진 해의 발바닥을 주무른다 달은 이곳에 와 첫 치마폭을 푼다 은목서 향기 가득한 치마폭 안에 마을의 주황색 불빛이 있다 등이 하얀 거북 두마리가 불빛과 불빛 사이로 난 길을 리어카를 밀며 느릿느릿 올라간다 인간은 해와 달이 빚은 알이다 알은 알을 사랑하고 꽃과 바람과 별을 사랑하고 삼백예순날 개펄 위에 펼쳐진 그리운 노동과 음악 새벽이면 아홉마리의 순금빛 용이 인간의 마을과 바다를 껴안고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감성충만 시 2021.01.11

기다림 - 곽재구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달콤한 잠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럴때면 나는 산 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중 눈빛 초롱하고 허리통 굵은 몇 올을 끌어다 눈에 생채기가 날 만큼 부벼댑니다 지난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강둑에 매인 채 출렁이고 작은 물새 두 마리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갑니다 사랑하는 이여 설령 당신이 이 나룻터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습니다 설레이는 물살처럼 내 마음 설레이고 또 설레입니다

감성충만 시 2021.01.11

마음 - 곽재구

아침 저녁 방을 닦습니다 강바람이 쌓인 구것구것이며 흙 냄새가 솔솔 풍기는 벽도 닦습니다 그러나 매일 가장 열심히 닦는 곳은 꼭 한군데 입니다 작은 창 틈 사이로 아침 햇살이 떨어지는 그 곳 그곳에서 나는 움켜진 걸래 위에 내 가장 순걸한 언어의 숨결들을 쏟아 붓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찾아와 앉을 그 자리 언제나 비어 있지만 언제나 꽉 차있는 빛나는 자리입니다

감성충만 시 2021.01.11

신년시 - 안도현

닭이 울어 해는 뜬다 당신의 어깨 너머 해가 뜬다 우리 맨 처음 입맞출 때의 그 가슴 두근거림으로, 그 떨림으로 당신의 어깨 너머 첫닭이 운다 해가 떠서 닭이 우는 것이 아니다 닭이 울어서 해는 뜨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 났을 때 처음 눈 뜬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울었던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하고 나하고는 이 아침에 맨 먼저 일어나 더도 달도 말고 냉수 한 사발 마시자 저먼 동해 수평선이 아니라 일출봉이 아니라 냉수 사발 속에 뜨는 해를 보자 첫닭이 우는 소리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세상의 끝으로 울음 소리 한번 내질러 보자

감성충만 시 2021.01.11

직립보행

직립보행은 축복인가 업보인가 ? 직립보행을 하면서 인간은 두가지 방법으로 똑똑해지기 시작했다 첫번째는 언어의 사용이다 직립보행을 하면서 목이 펴지고 성대가 변형되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 특유의 사회성으로 언어가 발달했고 말을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줄 아는 주체성이 생기게 되었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줄아는 객관성이 생기게 되면서 인간을 생각을 하는 동물이 되었다 두번째는 양손의 자유로움이다 네발일 때는 고양이나 개처럼 행동했을 테지만 두발일 때는 두손이 자유로워 물건을 잡고 활용을 한다든지 다른 사람과 접촉을 하는 등의 활동으로 뇌를 움직이게 된것이다 오른쪽 손을 많이 사용하여 사고가 발달하고 안쪽 뇌를 사용하게 되어 감성 또한 발달되어 생각을 할 수 있는 동물이 된것이다 나무는 뿌리가 먼저..

감성충만 시 2021.01.11

어쩌다 시인이 되어 - 이기철

내 어쩌다 시인이 되어 이 세상길 혼자 걸어가네 내 가진 것 시인이라는 이름밖엔 아무것도 없어도 내 하늘과 땅 구름과 시내 가진 것만으로도 넉넉한 마음이 되어 혼자라도 여럿인 듯 부유한 마음으로 이 세상길 걸어가네 어쩌다 떨어지는 나뭇잎 발길에라도 스치면 그것만으로도 기쁨이라 여기며 냇물이 전하는 마음 알아들을 수 있으면 더없는 은총이라 생각하며 잠시라도 꽃의 마음, 나무의 마음에 가까이 가리라 나를 채찍질 하며 남들은 가위 들어 마음의 가지를 잘라낸다 하지만 나는 풀싹처럼 그것들을 보듬으며 가네 내 욕망의 강철이 부드러운 새움이 될 때까지 나는 내 체온으로 그것을 다듬고 데우며 가네 내 어쩌다 시인이 되어 사람과 짐승, 나무와 풀들에 눈맞추며 맨발이라도 아르지 않게 이 세상길 혼자 걸어가네

감성충만 시 2020.12.06

새벽 편지 - 곽재구

새벽에 일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의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감성충만 시 2020.12.06

아주 먼 그때 - 이기철

네 곁에 앉았다 떠나오면서 처음으로 내 속에 꽃이 핀 걸 알았다 어느 주소록에도 없는 내 이름을 네가 처음 불렀을 때 비로소 나는 한 그루 나무가 되었다 내 가난한 등을 두드려주는 것이 천천히 떠나는 계절뿐이었을 때 가난의 누이인 네가 와서 내 가슴의 동풍이 되어주었다 구름이 흘러가는 서쪽 바람이 불어오는 동쪽 그 어느 언저리에서 우리는 우리가 결코 먼지가 아님을 알았다 헐한 음식을 먹고 남루를 입었어도 우리가 신선한 별임을, 별일 수 있음을 알았다 꿈꾸는 밤이 잦아졌다 과오마저도 신선해지는 날이 있음을 알았다 하늘 쳐다보면 별의 말을 알아들을 것 같았다 긴 하루가 뻐뚜기 울음처럼 짧아짐을 알있다 모방할 수 없는 보석이 우리의 가슴에 숨쉬고 있음을 알았다 아주 먼 그때

감성충만 시 2020.12.06

가을 밤 - 이기철

나는 나뭇잎 지는 가을밤을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때로 슬픔이 묻어 있지만 슬픔은 나를 추억의 정거장으로 데리고 가는 힘이 있다 나는 가을밤 으스름의 목화밭을 사랑한다 목화밭에 가서 참다참다 끝내 참을 수 없어 터뜨린 울음 같은 목화송이를 바라보며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것임을 생각하고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보드랍고 이쁜 것임을 생각하고 토끼보다 더 사랑스러운 그 야들야들한 목화송이를 만지며 만지며 내가 까아만 어둠 속으로 잠기어 가던 가을 저녁을 사랑한다 그땐 머리 위에 일찍 뜬 별이 돋고 먼 산오리나무 숲속에선 비둘기가 구구구 울었다 이미 마굿간에 든 소와 마당귀에 서 있는 염소를 또 나는 사랑한다 나락을 실어 나르느라 발톱이 찢겨진 소 거친 풀 센 여물에도 좋아라 다가서먼 어둠 속에서 툭툭..

감성충만 시 2020.12.06

늙은 호박 - 박철영

세상사를 말할때는 겉만 보고 말하지 마라 홀로 꽃피우고 맺힌 호박덩이 일지라도 단 한 순간도 허투루 살지 않았다 숨 턱턱 막힌 삼복더위와 처서 넘은 입동까지도 지칠 줄 몰랐을 저 불 같은 성정 초겨울 서릿발 돋친 논두렁에서 넝쿨까지 마른 너를 거둬 두동강을 낸 뒤에야 한 여름날 사라진 뜨거운 해가 네 안에 빼곡한 걸 알았다 시집 월선리의 달 2015 문학들

감성충만 시 2020.12.06

꽃잎은 오늘도 지면서 붉다 - 이기철

오늘 내 발에 밟힌 풀잎은 얼마나 아퍘을까 내 목소리에 지워진 풀벌레 노래는 얼마나 슬폈을까 내 한 눈 팔 때 져버린 꽃잎은 얼마나 내 무심을 서러워했을까 들은 제 가슴이 좁고 산은 제 키가 무겁지만 햇빛 비치는 곳에는 세상의 아름다운 삶도 크고 있다 길을 걸으며 나는 오늘 이 길을 걸어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모두 나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그들이 걸어간 길의 낙엽 한 장도 쓸지 않았다 제마음에도 불이 켜져 있다고 풀들은 온종일 꽃을 피워들고 제마음에도 노래가 있다고 벌레들은 하루 종일 비단을 짠다 마른 풀잎은 이름만 불러도 마음이 따뜻하다 나는 노래 보다 아름다운 풀꽃 이름 부르며 세상길 간다 제 몸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뭇잎은 땅으로 떨어지고 제 사랑 있어 세상이 밝다고 꽃잎은 오..

감성충만 시 2020.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