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편지 - 정호승 오늘도 삶을 생각하기보다 죽음을 먼저 생각하게 될까봐 두려워라 세상이 나를 버릴 때마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 살아온 나는 아침햇살에 내 인생이 따뜻해질 때까지 잠시 나그네새의 집에서 잠들기로 했다 솔바람 소리 그친 뒤에도 살아가노라면 사랑도 팹배할 때가 있는 법이다 마른 .. 감성충만 시 2019.12.31
비오는 날의 풍경들 - 인애란 산다는 것은 어떤 이에게는 풀밭에 떨어지면 풀들에 깃드는 물방울같이 산다는 것은 어떤 이에게는 그 산에 깃든 풀 포기 하나까지 쓰다듬는 일이다 양철지붕에 썯아지면 쇠못 소리를 내는 물방울같이 산다는 것은 어떤 이에게는 그 삶에 부딪히는 날카로움을 하루하루 견디는 일이다 .. 감성충만 시 2019.12.31
마음속 푸른 이름 - 이기철 아직 이르구나 내 이 지상의 햇빛, 지상의 바람 녹슬었다고 슬퍼하는 것은 아직 이르구나 내 사람들의 마음 모두 재가 되었다고 탄식하는 것은 수평으로 나는 흰 새의 날개에 내려앉는 저 모본단 같은 구름장과 우단 같은 바람 앞에 제 키를 세우는 상수리나무들 꿈꾸는 유리 강물 햇볕 .. 감성충만 시 2019.12.31
내탓이오 - 최영욱 뭐가 내 탓인지 왜 내탓인지도 모른채 따라만 하던 기도가 휘어지고 구부러져 굴곡진 내 나이에 끝없이 되뇌어야 할 기도문이 되었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전부 다 내 탓이로소이다 감성충만 시 2019.12.31
동그란 길로 가다 - 박노해 동그란 길로 가다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있을수는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창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것 절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긴 호흡으로 보면 좋을 때도 순간이고 어려울 때도 순간인 것을 돌아보면 좋은 게 .. 감성충만 시 2019.12.13
단풍 드는 날 - 도종환 단풍 드는 날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빙하착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 감성충만 시 2019.12.13
널만나고부터 - 이생진 널 만나고부터 어두운 길을 등불 없이도 갈 것 같다 걸어서도 바다를 건널 것 같다 날개 없어도 하늘을 날 것 같다 널 만나고 부터는 가지고 싶었던 것 다가진 것 같다 감성충만 시 2019.12.13
벌레먹은 나뭇잎 - 이생진 벌레 먹은 나뭇잎 나뭇잎이 벌레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그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 감성충만 시 2019.12.13
차를 끓이며 - 임찬일 차를 끓이며 내 가슴에서 말라 가는 한 봉지의 밍밍한 하루를 끓인다 슬픔이나 쓰라린 일은 녹즙으로 풀리고 부질없이 나부끼던 영혼의 푸른 잎사귀도 마알갛게 우러난다 그래, 죽이란 것도 목숨을 잘 말렸다가 어느 날 순리의 불을 피우고 말갛게 말갛게 우려낸 한잔의 찻물이나 아닌지.. 감성충만 시 2019.12.13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 송경동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몇 번이나 세월에 속아보니 요령이 생긴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계절이라 생각될 때 그때가 가장 큰 초록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보인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뒤에 다른 광야의 세ㅐ계가 다가와 있었다 두번 다시는 속지말자 그만 생을 꺽어버리고 싶을 때 그.. 감성충만 시 2019.12.13
바람의 지문 - 이은규 바람의 지문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인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인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의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 감성충만 시 2019.12.13
아득하면 되리라 - 박재삼 아득하면 되리라 해와달, 별까지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보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 감성충만 시 2019.12.13
장맛비가 내리는 저녁 - 이상국 비가 오면 짐승들은 집에서 우투커니 세상을 바라보고 공사판 인부들도 집으로 간다 그것은 지구가 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비가 오면 마당의 빨래를 걷고 어머니를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고 강을 건너던 날 낯선 마을의 불빛과 모르는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비는 안 가본 .. 감성충만 시 2019.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