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행복했을 것이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반겨주고
가끔씩 흔들거리는 벼이삭과 눈인사도 나누며
참새들과 허공을 가르며 달리기 시합도 했던
그 때까지만 해도 기차는 참으로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차의 얼굴에 여드름이 몽글몽글 날 즈음
기차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했던 것이다
나는 왜 내 길을 벗어날 수 없을까 ?
새색시 가슴처럼 도툼하게 핀 벚꽃나무 를 보면
잠시라도 가던 길을 버리고 꽃망울에
입맞추고 실고
창가에 달빛 드리운 그런 밤이 오면
펄로에서 한 걸을 뛰쳐나와
당장이라도 그대에게 달려가련만
기차는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잠시 스쳐간 이름도 모를 간이역을
기차는 사랑하게 된 것이다
느끼고 싶어도 만질 수 없고
고백하고 싶어도 이름도 모르는 간이역을,
그래서 울었던 것이다
내 마음 알아달라고
시작과 끝을 수 십번 오가는 이유도
잠시라도 그대를 볼 수 있기에,
내가 늙어 고철이 되어 한 곳엘 자리잡고
누워야 한다면
민들레 마당을 갖고 있는 바로 그
간이역임을
알아달라고, 기억해 달라고
기차는 그렇게
기적소리를 내며 목놓아 울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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