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사려니 숲길 눈 위를 걸었다.
전에는
오름에 가기 위해 모인 날에
눈이 펑펑 쏟아지면
시외버스를 타고 가
하염없이 눈을 맞으며 걷곤 했는데,
요즘 바쁘다는 핑계로 몇 해 걸렀다.
지난 일요일에 그 가까이에 있는 삼다수숲 눈길을
원 없이 걸었는데, 웬 눈복
수요일에 또 눈길을 걷게 되었다.
동쪽 남조로변 붉은오름 입구에서 물찻오름 입구까지는 5.5km,
물찻오름 입구에서 비자림로변 사려니 숲길 입구까지는 4.5km,
도합 10km의 눈길을 종주한 셈이다.
길은 크게 삼나무와 자연림 숲으로 나눌 수 있으나
삼나무 숲길이 압도적으로 많다.
어찌 보면 그 풍경이 그 풍경 같으면서도
갈수록
새로워 보이는 그런 길이었다.
♧ 사려니 숲길 - 도종환
어제도 사막모래 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보다 다섯 배 열 배나 큰 나무들이
몇 시간씩 우리를 가려주는 길
종처럼 생긴 때죽나무 꽃들이
오 리 십 리 줄지어 서서
조그맣고 짙은 향기의 종소리를 울리는 길
이제 그만 초록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산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들을 주체하기 어려운 날
마음도 건천이 된 지 오래인 날
쏟아진 빗줄기가 순식간에 천미천 같은 개울을 이루고
우리도 환호작약하며 물줄기를 따라가는 길
나도 그대도 단풍드는 날이 오리라는 걸
받아들이게 하는 가을 서어나무 길
길을 끊어 놓은 폭설이
오늘 하루의 속도를 늦추게 해 준 걸
고맙게 받아들인 삼나무 숲길
문득 짐을 싸서 그곳으로 가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라산 중산간
신역(神域)으로 뻗어 있는 사려니 숲길 같은
♧ 수국 - 김수열
간밤 비바람이 심한 탓일가
사려니 길섶에 수국이 낭자하다
더러는 찢기고 더러는 꺾이고
아직 덜 여문 꽃망울
파리한 얼굴을 흙바닥에 묻었다
인기척에 놀란 노루가
때죽낭 사이로 총총총 사라진다
검은 까마귀 검게 울고
수국수국 수국꽃이 운다
나라가 걱정이다
나라가 걱정이다
♧ 마른 산수국 - 홍성운
온 섬에 폭설이 내려 길이 모두 지워진 날은 사려니숲길을 천천히 걸어가 보라 산수국 마른 꽃잎들 결로 남아 흔들린다
산에 든다는 건 마음을 비우는 일, 그러기에 야생화도 마른 꽃이 되기에는 바람에 향기를 풀고 색소까지 내줘야 한다
요즘 길섶에는 겨울 나비 한창이다 오가는 사람들의 동공 가득 묻어나는 가벼운 꽃의 날갯짓, 지난여름 꿈의 잔상들!
♧ 제주 사려니 숲길을 걸으며 - 東山 박태강
아름드리나무 빽빽이 늘어선 한라산 중턱 숲길을
수많은 연인 부부 친구 가족들
발걸음 보면
삶이 건강으로 이어져 행복을 찾는 길
높은 산길 물소리 하나 없이
이따금 들려오는 까옥 까옥 까마귀 소리
무엇이 바쁜지
말없이
재촉하는 숲길
수백 년 살면서 보는 나무
고작 백년을 못살고 가는 인생
너에게서 생명을 구하려
오늘도 많은 사람
바쁜 걸음 걷노라!
네 가슴에 안기면
기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먼 길 와서
네 품에 안겨
삶의 오르가즘을 느끼노라.
♧ 사려니 숲길을 걷다 - 오영호
가을빛 익어가는
사려니 길섶마다
가뭄과 긴 장마에도
인내와 침묵으로
피워낸
꽃과 열매를 단
나무들은 성자다.
얼마쯤 걸었을까
발걸음이 느려지고
그래도 불평 없이
따라온 바람과 햇살
때때로 허방을 짚는
또 다른 나를 본다.
♧ 사려니 숲길을 걸으며 - 潤疇 목필균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가 신성하다는
사려니 숲길로 예약 없이 들어선다
빼곡한 숲 사이로 흐르는
기분 좋은 바람
맨발로 걸어도 좋을 적톳길
드문드문 열려있는 푸른 하늘이 보내는
눈부신 햇살
온몸으로 호흡하며
홀로 걸어도 좋을 느낌표들
사는 일이 예약된 것만으로 채워진다면
어려운 일들 풀어가며 살 일이 있을까
사철 푸른 조릿대 길도
발걸음마다 자갈자갈 대답하는 송이 길도
쭉쭉 벋은 삼나무 길도
사려니 숲길의 한 가닥인 것을
가다가 돌아서 간들 누가 뭐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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