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메기 모른 식게 - 강봉수
물에 갇힌 섬동백
영등절 지나 동박새 하염없이 지져대더니
할아바님 우영밧 올해도 붉게 젖는다
자손을 탕진한 할아바님
장손집 둘째아들 양자 맞으시고
대를 이었더니
무자비한 꽃샘추위에 봄이 열리고
와싸와싸 허리끈 이어 잡고 내달렸던 장남은
오간데 없이 행불이라
귀신도 모르게 지냈다던 제사
이웃사촌 내력인 줄 알았더니
우리 조상의 일이라 하네
♧ 강정은 4․3이다 2 - 김경훈
-누가 강정이 4·3 아니라고 하는가
누가 강정이 4·3 아니라고 하는가
눈 못 감고 죽어간 영령들이
부릅뜬 눈으로 강정을 호곡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강정을 4·3 아니라고 말하는가
4·3에서 평화와 인권을 배웠다는 이들이여
인권이 낭자히 유린되고 평화가 유혈로 깨지는데
왜 강정은 4·3이 아니라고 하는가
제주의 자존이 구겨진 휴지처럼 뒹구는데
방관과 안일로 역사의 무덤을 파는 자들이여
그 무덤엔 후손들이 풀 하나 뽑지 않을 터이니
4·3을 거느려서 화해와 상생을 말하지 말라
왜 강정이 4·3인지도 모르는 이들이여
♧ 서모봉 쑥밭 - 김수열
함덕 서모봉
늦은 유채꽃에 취해
해안 능선 따라 걷다가 길섶
누군가 깨고 지나간 쑥밭
나도 쭈그리고 앉는다
한 줌 뜯어다 쑥국이나 끓여야겠다고
무심히 쑥 모가지를 비트는데
발밑에 통곡 소리 낭자하다
낯선 이들이 들어닥치자 아비는
처자와 어린것들을 돗통시에 숨겼고
아비 숨통을 끊은 대창들은 불콰한 낯빛으로
서모봉을 넘었다
통곡할 새도 없이
다른 대창들이 들이닥쳤고 어미는
어린것들을 치마 속에 숨겼다
나도 죽이라, 말이 채 끝나기 전
치마폭으로 대창이 들어왔고
가랑이 사이에선 쿨럭쿨럭 어린 피가 쏟아졌다
오랏줄에 묶인 어미는 미친년처럼 후여후여
서모봉을 넘었다
노란 봄에 취해
한때 쑥밭이었던 서모봉을 내려오는데
뒤따르는 통곡 소리 통곡 소리
쑥 쥔 손이 불편하다
♧ 벚꽃이 피면 - 김영란
이른 봄
쇠창살로
햇살이 숨어든다
어느 날 빨갱이 기집이라고 느닷없이 잡혀갔을 때 내 등엔 세 살짜리 딸이 업혀 있었고, 새 생명 하나 움트고 있었지. 이유도 물을 새 없이 몽둥이찜질 당했지. 비바람치던 어느 겨울 밤 난생 처음 배를 타 봤어. 어디로 가는 건지 왜 나를 끌고 가는지,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어. 죽음보다 더한 공포, 물을 수가 없었어. 동물적 본능이었을까 시퍼렇게 참던 아이. 맞은 다리 찢기어 썩어들고 진물 나고 흰 뼈가 다 드러나도록 신음 한 번 안낸 거야. 어미라는 작자가 제 세끼 아픈 것도 모른 거야. 마지막 의식인 듯 어미젖 부여잡고 싸늘한 입맞춤으로 작별인사 하고 갔어. 전주형무소 공동묘지, 거기가 어디였을까? 묻어두고 안동으로 이감되는 날, 벚꽃 핀 걸 보았어.
딸아이
옹알이처럼
내려앉고
잊었어
♧ 첫 매화 - 도종환
섬진강 첫 매화 피었습니다 곡성에서 하류로 내려가다가 매화꽃
보고는 문득 생각나서 사진에 담아 보냅니다 이 매화 상처 많은 나무였습니다
상처 없이 어찌 봄이 오고, 상처 없이 어찌 깊은 사랑 움트겠는지요
태풍에 크게 꺾인 벚나무 중에는 가을에도 우르르 꽃을 피우는 나무 있더니 섬진강 매화나무도 상심한 나무들이 한 열흘씩 먼저 꽃 피웁니다 전쟁 뒤 폐허의 허망에 덮인 집집마다 힘닿는 데까지 아이를 낳던 때처럼 그렇게 매화는 피어나고 있습니다
첫 꽃인 저 매화 아프게 아름답고, 상처가 되었던 세상의 모든 첫사랑이 애틋하게 그리운 아침 꽃 한 송이 처절하게 피는 걸 바라봅니다 문득 꽃보러 오시길 바랍니다
지리산 문수골에서 원규가
♧ 4․3의 노래 - 문충성
게난 홋설 잘 살게 되난
거들거리멍
무싱 것들 햄수광
웬수처럼 경들 싸우지들 맙주
영정 죽어지게 사랑이나 허당 갑주
반백년이 넘었수게
경허난 이제사
끝나감수광 아아! 끝났수광
끝나지 안았수광 아직도
끝날 거 같지 않수광 영영
이름난 동산에 일년에 ᄒᆞᆫ 번씩
모일 사람 다 모영들
용서와 화해와 상생과 평화만 노래햄수광
시뻘겅허당 희영해진 눈물만
♧ 관음사 까마귀 - 오영호
관음사 숲을 걷다 길이 막힙니다
얽힌 가시덤불 위로 4월의 모진 바람이
낮은 포복으로 살금살금 다가와
부러진 생목들을 껴안고
부들부들 떱니다.
어리목에서 날아올라
아흔아홉골 충혼각을 돌아
관음사 늙은 밤나무에 앉아 메시지를 보내면
봉개동 평화공원을 지던 친구들도 달려와
신원의 노랠 부릅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무자년 가신 목숨
부러진 날개와 다리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오늘도 펄럭이지 못하는
찢긴 만장만 기웁니다.
* 제주4.3 64주년 기념 시선집 '4월 꽃비'(제주작가회의 편, 심지, 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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