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충만 시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 이병률

하동댁 2016. 3. 2. 23:08

 

 [ 선암사 에서 ]

 

 

빈집으로 들어갈 구실은 없고 바람은 차가워 여관에 갔다

마음이 자욱하여 셔츠를  빨아 널었더니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눈물 같은 밤

그 늦은 시각 여관방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옆방에 머물고 있는 사내라고 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왜 그러느냐 물었다

말이 하고 싶어서요 뭘 기다리느라 혼자 열흘 남짓

여관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쓸쓸하고  적적하다고

 

뭐가 뭔지 몰라서도 아니고 두려워서도 아닌데

사내의 방에 가지 않았다

간다 하고 가지 않았다

 

뭔가를 기다리기는 마찬가지

그가 뭘 기다리는지 들어버려서

내가 무얼 기다리는지 말해버리면

바깥에서 뒹굴고 있을 나뭇잎들조차 구실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셔츠 끝단을 타고 떨어지는 물소리를 다 듣고

겨우 누웠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

온다 하고 오지 않는 것들이 보낸 환청이라 생각했지만

끌어다 덮는 이불 속이 춥고  복잡하였다

 

[바람의 사생활]  창작과 비평서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