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은 간다 - 고성기
4월이 아무리 익어도
피지 않고 지는 꽃도 있다.
*황무지 가득 덮어 뚝뚝 지는 잔인한 달
**세월호
세월을 묻고
문 닫아 삼킨 바다
2014년 4월 16일
초침까지 멎은 아침
산 자는 모두 죄인 하늘 향해 두 손 모은
그러나
신은 없었다
무책임만 있었다.
퍼렇게 봄날은 간다
빨갛게 동백은 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역사가 준 묘약이려니
긴 겨울
그리 밟아도
청보리 피지 않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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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S 엘리아트의 ‘황무지’
** 세월호 인천, 제주를 잇는 6,800톤급 국내 최대 여객선
♧ 짱뚱어와 농게 - 장승심
짱뚱어들 폴딱폴딱 이리저리 꼬불꼬불
신안증도 갯벌은 짱뚱어 마당인데
잡을까 생각만 해도
저만치 도망가네
왕집게발 농게들 슬금슬금 눈치코치
신안증도 갯벌에 집 만들랴 경계하랴
저리가
집 지키느라
더위도 잊고 있네
♧ 시, 들어간다 - 이소영
명주실에 지워진
어느 가야금 명인의 지문
긴 약력처럼 선명히 찍힌
지문조차 부끄러운 날
내 안을 재검색하다 알았네
깊고 실한 뿌리 내리지 못한 채
서둘러 시의 꽃만 피우려다
시들어
시, 들어간다는 걸
♧ 꽃비 - 이무자
핏기 없이 다문 파리한 입술
늘어진 소매 자락 끝으로
초점 잃고 너울거리는 춤사위는
평생 한으로 들먹이는
울 할머니 소리 없는 흐느낌
아직도 삭히지 못한 불씨
울부짖는 통증으로
허공을 떠돌다
시리고 아린 바람에 터트린 울음
꽃비 되어 4월의 대지를 적시니
허기진 영혼 뉠 곳 찾아 거리를 기웃될 때
상춘객은 깔깔거리며 그 길을 걸어간다
♧ 귀향 - 이명혜
해거름녘
시름 한 보따리 걸머지고 나 되돌아간다
그곳엔
단지 내 몸 한 가닥 뉘일 작은 방 하나
구석구석 후각으로 다가오는 이야기
잠시 머뭇거리던 어린 시절
와락 다가와 안기다
원시의 흔적으로 남겨진 뻐근한 그리움
모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모두 용서받을 수도 있을까?
사방을 둘러본다
♧ 완도항 스케치 - 양민숙
-완도 등대
끊긴 진주목걸이에서
알알이 흩어진 저 진주알들,
저 섬들,
만날 듯 만날 듯
애태운다
오가는 사람들
무게를 덜어내는 곳
나선형 줄 따라
치렁치렁 서글픈 사연 흐르는
완도 뱃길,
그 길을 붓질하다
핏줄처럼 터지는
저 물결
♧ 서는 곳이 다르면 - 안상근
서는 곳이 다르면 풍경이 달라지듯이
골에 서면
나무만 보이고
능선에 서면
숲만 보이더라
♧ 아버지는 목수였다 - 송창선
아버지는 목수였다
나무를 자르고 깎아
작은 세상을 만들었으나
정작 아버지의 세상은 아니었다.
정과 못을 세상을 향해 내리쳤으나
아버지의 삶에 박혔다.
때로 봄날 대팻날 같았으나
세월 앞에 무디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의 목수연장이
삶의 무게만큼
고향에 남겨졌다.
♧ 무제 - 권재효
-달빛 이미지
싸늘한 달빛
청솔가지에 앉아 있는
저 무정한 것
돌아선 이의 뒷꼭지에
피어나는
예쁜 독버섯
어느 땐가는 풀어야 할
당신과 나의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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