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충만 시

[스크랩] 홍해리 시집 `치매행致梅行`의 가을

하동댁 2017. 2. 10. 14:03


요즘 Facebook에는

洪海里 시인이

'아내에게 바치는 안타까운 사랑 고백' 시편인

치매행致梅行’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근래 주변에 환자가 늘면서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는 '치매'에 대해

‘이는 치매癡呆가 아니라 치매致梅라 함이 마땅하다면서

이 시를 그 환자를 돌보고 있는 분들에게 바쳐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고 싶어 합니다.

 

가을을 맞아

분위기 물씬 풍기는 갈대 사진과 함께

그 중 가을 관련 시 몇 편을 옮겨 봅니다.

     

 

갈대숲

   -치매행致梅行 · 26

 

바람 부는 날에는 갈대숲에 가리

 

날개 접고 포근히 잠든 청둥오리

 

빈 들녘에 서걱이는 갈바람 소리

 

흘러가는 세월 따라 잠든 물소리

 

바람 부는 밤에는 갈대숲에 가리

 

아내 손을 잡고서 갈대숲에 가리.

     

 

가을 하늘

   -치매행致梅行 · 28

 

아득하다는 거리는 차라리 없는 것

 

덧없다는 말은 오히려 애틋한 것

 

우리의 인연은 전생서 이생까지

 

아득한 거리는 이승서 저승까지

 

아내여, 지금 가는 길이 어디리요

 

하늘은 맑은데 오슬오슬 춥습니다.

      

 

 

무현금無絃琴

   -치매행致梅行 · 29

 

오동이 천년을 서서 속을 비우니

줄이 없어도

바람이 와서 거문고를 뜯고 있습니다

 

금현琴絃이 울지 않는데도 귀가 향긋합니다

아내도 저 소리를 듣고 있을까요

아내도 귀가 향긋해 하고 있을까요

 

갈비뼈를 현금 삼아 한 곡조 뜯으면

봄바람 향기로 울릴까요

향기로운 꽃으로 들릴까요

 

아내 홀로 오는 길 어두울까 봐

등불 하나 밝혀 걸고

가슴에 촛불 하나 켜 놓았습니다.

     

 

문답연습

   -치매행致梅行 · 30

 

아내는 묻고

나는 대답하고,

짜증내고

후회하고.

 

또 묻고

대답하고,

화내고

반성하고.

 

하루 종일

묻고

하루 종일

대답하고,

 

짜증내고

화내고

후회하고

반성하고.

     

 

 

빈집

   -치매행致梅行 · 32

 

이승 길

구비구비

돌아가는 길

꽃 피고

지면서

하늘까지 밝혀주는

산굽이 물굽이마다

이름 지우고

그림자 지우고

너에게 주는

아무것도 없는

노을 진 산머리

눈먼 천리

길 없는 길 벋어가고

물 마른 강 중심으로

귀먹은 천년

잠들어 가고 있는

빈집 한 채

아득합니다.

     

 

노래

   -치매행致梅行 · 33

 

눈물로 노래를 씻어 부르면

노래마다 구구절절 빛이 날까

눈썹 끝에 별을 달고

홀로 가는 길

별 내린 풀숲에서

실을 짜 엮고 있는 풀벌레들

계절은 가릉가릉 현악기로 울리고

달빛 타고

하늘 가득 날아가는 기러기 떼

허공중에 떠가는

수많은 섬이구나

날갯짓마다 파도가 일어

가을이 젖는데

내 저 섬을 비추는 등대라면

하늘길 안내하는 불빛이라면!

     

 

잠시

   -치매행致梅行 · 34

 

푸르고 짙던 그늘

가을이 되자 많이 엷어지고

모든 길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내가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피가 도는 동안 등 떠밀지 말아 다오

 

잠시 네 곁에 머물다 가는 거야

아프다는 말 하지 말라고

한마디 하고 나서,

 

나도 한 마리 누에가 되어

실을 낳을 수 있다면

말씀의 명주明紬옷 한 벌 마련하련만.

     

 

 

초겨울

   -치매행致梅行 · 35

 

풀잎 시들고

바람 잠들고

초로草露처럼 맑게 나이 들 수 있다면

할 일 다 했다고

맨발로 건너가는

찬 시냇물

천명天命의 흐름 좇아

그냥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일상의 형상과 빛깔들

제발 내버려 둬 달라고

사람이 하늘이란 말 되뇌면서

이슬 맑은 길 따라

혼자서 가고 있는

초로初老 한 사람 보입니다.


  * 홍해리 시집 '치매행致梅行'(황금마루, 2015.)에서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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