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충만 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 고정희

하동댁 2016. 9. 14. 20:44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 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