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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에디트 피아프- in 라비앙로즈
하동댁
2010. 11. 2. 10:49
에디트 피아프(Eidth Piaf)
에디트 파이프는 어떤 의미에서는 전 세계에서 프랑스 샹송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미국인들은 만일 그들이 파리에 온다면 아마도 거리에서 마주치는 젊은이들에게 피아프의 펜이냐고 물을 지도 모른다. 물론 80년대 이후 태어난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는 자신들이 태어나가도 훨신 전에 죽은 피아프는 다만 전설상의 가수에 불과 하겠지만 이것이 피아프를 폄하할 이유는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몽으로 집에 돌와 와 티비를 켜거나 라디오 방송의 노스탈지아 프로를 듣거나 하면 언제든지, “사랑의 찬가”의 그녀만의 독특한, 마치 목소리를 깨부수는 듯한 야릇한 매력의 가수를 만나기 때문이다. 그녀가 죽은 지 이미 반 세기가 다 되어가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직 살아있는 전설로 남아있는 것이다.
생애
에디트는 1915년 파리 20구의 벨빌가 72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루이 알퐁스 가시용은 유랑 서커스 단의 곡예사였으며 어머니인 아네타 밀라드는 아마 알제리의 카빌리아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 살다 프랑스로 이민 온 거리의 가수였다. 그녀는 말하자면 가난과 궁핍, 그리고 서커스로 대변되는 거리의 아이였던 셈이다. 어머니는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딸을 언제나 모친, 그러니까 에디트의 외가쪽 할머니에게 맞겼는데, 카빌리아 출신인 이 할머닌 알콜 중독자에 가까워서 손녀를 거의 돌보지 않아 어린 에디트는 항시 꾀죄죄한 더러운 옷을 입어야 했고 잘 씻지도 못하고 음식도 변변치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녀의 젓병의 꼭지는 언제나 포두주의 빨간색으로 물들어 있을 정도 였다고 기억한다. 어린 에디트는 18개월 동안이나 이 빈민굴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나날을 보내야만 했었다. 그러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에디트를 찾아온 아빠가 아이가 가여워 보였던지 자신의 어머니(그러니까 에디트의 친가쪽 할머니)에게 맡긴다. 이 할머니는 노르망디 베르네의 술집(실제로는 윤락이 주업종인) 주인이었는데 어린 에디트는 여기서 창녀들의 마스코트처럼 귀여움을 받았었다. 아무튼, 예쁜 리본도 달린 옷을 입을 수 있었고, 최소한 질 좋은 노르망디 우유에, 맘껏 먹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7살인가 8살 되던 해에 각막염에 걸려 시력을 잃었는데 같은 병에 걸려 시력을 잃은 소녀가 리시으의 테레즈 마르틴의 무덤에 가서 기도한 후에 시력을 되찮았다는 말을 듣고 할머니가 에디트를 데리고 가기로 결심했다. 기차를 타고 리시으로 갔으며 무덤에 이르러 간청한 뒤 그후 밤에는 눈에 붕대를 감았다고 한다. 이렇게 8일을 보낸 후에 에디트는 시력을 되 찾았다. 이 때문인지 에디트는 살아 생전에는 테레스의 메달을 목에 걸고 다녔으며 그녀에게 각별한 헌신을 표시했다.
전쟁이 끝나고 어버지가 돌아오자 딸을 데리고 예전의 거리의 가인 생활로 되돌아간다. 여기서 에디트는 유랑 서커스 단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17세 된 던 해인 1933년 에디트는 당시의 연인이었던 루이 뒤몽에게서 딸을 하나 낳는데 이 딸은 뇌막염에 걸려 두 해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카바레의 가수
1935년 샹젤리제가에 있는 카바레 르 제르니의 주인인 루이 르플레가 거리에서 에디트를 발견한다. 당시에 에디트는 주로 프레헬의 노래를 주로 레파토리로 삼았는데, 르플레는 에디트에게 “라 몸므 피아프” 라는 예명을 지어준다. (라 몸므는 최근 나온 영화의 원 제목인데, ‘쪼그마한 기집애’ 라는 뜻의 속어에 해당된다. 실제로 에디트의 체구는 그야말로 왜소하다. 이 영화는 한국에서는 라비앙 로즈로 영어권에서는 ‘에디트 피아프의 강열한 생애’ 로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으로 확인되었다. 그녀의 재능과 독특한 목소리는 곧 많은 펜을 만들었고 그 중에는 작곡가인 헤이몽 아조와 특히 평생 에디트를 떠나지 않은 친구가 된 작곡가이자 파아니스트인 마그리트 마노(여자임)는 에데트를 위해서 ‘사랑의 찬가’, ‘나의 병사’, ‘미로드(마이 로드)’, ‘단 하루의 연인’ 등을 작곡해 주었다.
1936년 에디트는 처음으로 “ 종탑의 레 몸므” 라는 타이틀을 내건 앨범을 냈는데 이 것이 일약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대박이 예약될 순간 운 나쁘게도 르플레가 자택에서 살해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마도 유흥가인 몽 마르트 근처의 피갈가의 폭력배들이 관련된 사건이었던 것 같다. 이와 관련된 오해로 에디트는 미디어의 스포트 라이트를 잃고 다시 별 볼일 없는 카바레의 가수로 되돌아간다. 그러자 아조와 다시 접촉하여 1937년 정식으로 데뷔하게 되는데 이 때 에디트는 아조의 연인이 된다. ‘조그만 기집애’을 손에 넣은 아조는 그녀를 이른바 뮤직 홀의 가수로 키운다.
뮤직홀의 스타
이렇게 해서 1937년 파리의 ABC에서 데뷔하자 그녀는 즉각 라다오를 타고 프랑스 샹송의 스타로 발돋음 한 에디트는 30년 대 후반 은막계의 스타로서 영화에도 몇 번 출현한다. 나찌 점령기에는 이름을 에디트 피아프로 개명하고 공연을 계속하나 나찌에 굴복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교묘한 저항의 뜻을 내포한 노래들을 불렀다.
1944년 무랭 루즈에서 공연 할때는 아직 신참이었던 이브 몽땅이 공연의 도입부를 맡았는데 이미 카리스마 가득한 스타였던 에디트는 재능있고 감미로운 목소리 특히 잘생긴 그에게 아마도 첫 눈에 반하여 이른바 연애계의 스폰서 역할을 하게 된다. 같은 해 아버지, 이듬 해 어머니도 돌아가신다. 몽땅은 그 이후 뮤직홀의 스타가 되며(les feuilles mortes = autumn leaves(영), 고엽의 가수) 에디트는 1947년 미국 공연을 떠나게 된다.
세계적인 스타
1948년 뉴욕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마친 에디트는 후일 라이트 급 세계 참피온이 되는 마르셍 세당이라는 유명 권투 선수를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졌는데 세당은 49년 파리-뉴욕 행 비행기 사고로 죽는다. 이 슬픔으로 에디트는 마약 중독이 된다. 아직도 애창되는 ‘사랑의 찬가’, ‘ 오! 하는님’ 등의 노래는 이 시기에 나온 것들이다.
1951년 그녀의 비서이자 운전수 였던 샤를르 아즈나부르가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납자가 되며, 그 역시 성공을 거둔다(이자벨, 라 맘마 의 작가이자 가수). 1952년 7월 프랑스 가수인 작크 필과 결혼하는 데- 이 때 중인이 바로 1940년 대의 세계의 디바였던 마를렌느 디에트리히(블러그 참조) 였다- 56년 이혼한다. 53년 부터는 마약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치료를 받고 다시 뮤직홀의 스타가 되어 해외 공연을 떠난다. 특히 1956년 뉴욕의 카네기 홀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이제 조르즈 무스타키가 그녀의 새로운 연인이 되었는데 둘 이 함께 여행하다 심한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하는 데 이것이 그녀의 건강을 더욱 악화 시켰다. 1959년 뉴욕 순회 공연 중 에디트는 무대에서 쓰러진다. ( 영화의 처음 시작 장면인 거 같음...제가 시간 관계상 아직 영화를 자세히 다 못 봤슴). 이후 파리로 돌아오는데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더구나 곁을 지키던 무스타키도 떠나 버렸다.( 이는 무스타키가 그녀의 카리스마를 참지 못하고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수염이 더부룩한 무스타키의 인상을 참조 하시기 바람. 성격 있어 보임. 원숭이 처럼 생긴 얌체 같은 아즈나부르나 여자들에게 아양이나 잘 떨거 같은, 기생 오래비처럼 생긴 이브 몽탕의 사진도 참조해 보시기 바람. 암튼 가수로서의 인기는 그들이 더 많았을 지도 모르지만 전 무스타키가 훨 더 멋져 보임 ㅎㅎㅎㅎ)
1961년 부뤼노 코카트릭스의 요청으로 파리의 옹렝피아에서 공연을 한다. 당시 옹렝피아는 재정난으로 문을 닫아야 할 사정에 처해있었다. (오늘 날에는 옹렝피아는 문화제로 지정되어 국가 보조를 받아 그 명맥을 유지한다) 이 때 그녀는 유명 한 “ 아니,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라는 노래를 부른다. 이 공연이 옹렝피아를 다시 살렸으나 그녀의 건강 상태는 공연 중 두 발로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1962년, 47세의 나이로 병들고 중독되어, 완전히 탈진한 에디트는 27살의 젊은 가수 였던 테오파니 람부카스와 결혼한다( 그래서 그녀의 비명에 마담 람부카스라는 이름이 새겨진다). 그녀는 그에게 사라포(그리스어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뜻임)라는 예명을 부쳐 주며 다시 한번 그녀가 그의 전 애인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연예인으로서 성공의ㅡ 길을 예약해 주려고 둘이서 함께 보비노에서 노래를 부른다. 이 때 타이틀이 “ 사랑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인가?” 였다.
1963년 초 그녀의 마지막 곡인 “베를린의 남자”를 녹음 한다.
에필로그
1963년 10월 10일 13시 치료자 찾아갔던 칸느 근처의 프라스카시에에서 절친한 친구였던, 시인이자 학술원 회원인 장 콕도가 죽은 후 몇 시간뒤에 에디트도 숨을 거둔다. 프랑스로서는 이날 이중의 손상을 입은, 일진 사나운 날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운구는 비밀리에 파리로 이동되었으며 이후 죽음 공시적으로 발표되었으며 수 많은 애도의 물결을 뒤로 한 채로 파리의 페르랴 세즈에 안치되었다.
평범하지 않은 개성과 목소리로 그녀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프랑스 샹송의 상징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프랑스의 샹송의 맥을 이어갈 만한 가수들을 차례로 키워냈다는 점도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모두가 자신의 애인이라는 필수 과정을 거쳐가게 하였지만 이것이 그녀가 재능을 알아보는 안목을 폄하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늘날 그녀의이미지는 언제나 검은 옷을 입고서 무대에 선 앙칼진 목소리의 연약한 체구의 가인과 연관 되어진다.
-페르 라 세즈의 피아프의 묘-
- 한 독자가 그린 피이프의 크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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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의 노래는 "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Je ne regrette rien" 라는 곡으로서 1961년 거의 마지막 공연이라 할 수 있는 옹렝피아 공연에서 부른 곡이다. 어찌 보면 아득한 먼곳에서 와서(?) 가련하고도 격렬하고 파란 만장한 짧은 한 생을 살다간 피아프 였던 만큼 마지막 공연의 마지막 곡이 그 의미도 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동영상 자체는 2004년 가장 유망한 신인가수 중의 하나인 시멘느 바디 가 아마도( 내 기억으로는) 카지노 드 파리에서 현대 디지털 기술을 동원하여 에디트의 노래를 듀오로 합성하여 재현한 것이다. 제목 자체도 "불가능한 두오" 였다.
출처 : 카르미나
글쓴이 : 카르미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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