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충만 시

차를 끓이며 - 임찬일

하동댁 2019. 12. 13. 12:08



차를 끓이며


내 가슴에서 말라 가는 한 봉지의

밍밍한 하루를 끓인다

슬픔이나 쓰라린 일은 녹즙으로 풀리고

부질없이 나부끼던 영혼의 푸른 잎사귀도

마알갛게 우러난다

그래, 죽이란 것도 목숨을 잘 말렸다가

어느 날 순리의 불을 피우고

말갛게 말갛게 우려낸  한잔의

찻물이나 아닌지


이 뜨거운 깨우침을 후후 불어 마시며

찻잔 같은 풍경 위에

내 맑은 눈빛을 올려 놓는다

향기로워라, 가끔씩 생활을 끓이는 시간

한 모금의 명상으로 가슴을 적시며

헛된 욕망을 걸어 잠근 후

그냥 숨이라도 끊어진 듯 슬그머니

일상의 문 밖으로 나갈 수는 없을까

끓이면 끓일수록 우러나는

한 잔 푸른  빛깔을 건져낼 때마다

혀 끝에 쓰게 얹히는 인생의 떨떨함

차를  끓이다가 자꾸자꾸 쏟아 버리고 싶은

아직도  덜 마른 내 삶의 잎사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