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충만 시

[스크랩] 풍경의 깊이/김사인/(낭송:단이)

하동댁 2018. 6. 13. 20:07

        풍경의 깊이 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이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 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ㅡ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창작과비평사, 2006)


출처 : 풍경속 詩 한송이
글쓴이 : 시풍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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