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봄꽃들의 향연
♧ 배꽃 - 하두자
바다 가득 밀려오는
산호초 붉은 바람에
온 몸의 피돌기 돌아 연초록 잎이 돋는다
순간의 빛살과 그림자 한 몸이 되어
바람끝 따라 한 시절 터지고 싶은 욕망
내 안에 쌓인 순백의 향내
그 열망에 나는 떨고 있다
빗장 굳게 닫은 창문들 열어제끼고
방을 뛰쳐나간 꽃망울들이
하얗게 하얗게 폭죽 터뜨리며 무너진다
세상이 흔들릴 적마다
나는 황홀하다
♧ 바람꽃 - 김정호(美石)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어깨위로 흘러내리면
또 쓸쓸함에 젖어야 하나
메마른 안개비가 들판을 적시고
꽃잎이 말없이 질 때
세월은 서둘러 간다지만
아직도 부르지 못한 내 노래
무거운 침묵의 그림자가 되어
나를 끌고 있다
상처 입은 야윈 바람
나직이 휘파람을 불고 있다
바람꽃 한 송이 내 사랑
작은 꽃잎이 하늘을 가득 이고
그리움이 나지막하게 흘러내리면
가슴 앓은 환영 하나
그것은
잃어버린 희미한 내 그림자
♧ 모과꽃 - 김승기
천연두 마마를 앓듯이
겨울을 살아낸 삶
힘 넘치게
푸른 잎 틔우다
새잎마다 비늘 번득이면서
연홍색 꽃을 피우면
내 팔뚝에도 불끈 힘줄이 서다
맑은 영혼으로
햇살마다 실어 올리는 꽃향
덩치 큰 곰보의 얼굴이
오히려 예쁘다
여름 내내 정성으로 키우는 열매
그 달디 단 향이
가을을 듬뿍 적시면
하늘이 깜짝 놀라다
누가 너를 못난이라 하느냐
사람의 눈으로 자연을 들여다본다는 것
아주 조심스런 일이야
♧ 자목련의 봄 - 未松 오보영
자칫 잃을 뻔 했던 봄
뜻하지 않은 찬 기운에
미쳐 피워보지도 못할 수 있었던
꽃망울
활짝 터뜨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님 기대하던 소박한 모습
원래 그대로
다 보여줄 수 있으니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 진달래 - 양전형
다시는 나를 부르지 마라
내 맘 속 천 리 먼 길
사랑의 티가 박힌 늑간살을 지나
어질증 폭발처럼 흐드러지게
알몸 도발을 다시 해야 하느니
나를 부르지 마라 피지 않겠다
어디 한 번
눈물 괴이도록 열매 하나쯤
벅차게 달려준 적 있었는가
헤픈 늦삼월
고요만 무성한 허기진 숲속
제발 내 이름 부르지 말라니까
♧ 박태기나무 꽃 - 임두고
늦은 사월
사방이 수초처럼 젖어 있어
까닭모를 내 그리움
그 속 깊은 곳까지 젖고 있다.
문득 젖은 알몸으로 다가서는
뜰 앞의 박태기
박태기나무 꽃들은
그저껜가 그그저껜가
계단 위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던
그녀의 치마폭처럼
자줏빛
지울 수 없는 자줏빛이다.
박태기
박태기나무 꽃이여
하필이면 네 꽃이름이 박태기인가
아무렇게나 불리워진
네 꽃이름으로 인하여
나는 지금 아무렇게나 나뒹굴던
어린 시절
마른 수수깡 팔랑개비처럼 가벼워진다.
그리움은 젖을수록 가벼운 날개를 다는가
내 가슴은 지금
그 모순을 접어 만든 팔랑개비
누가 작은 바람끼만 건네도
천만 번 회오리치며 돌아버릴 것 같은
미쳐버릴 것 같은
가벼움 속으로……
나는 지금 그렇게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있다.
박태기
박태기나무 꽃이여
네 꽃이 핀 것은
이제 더이상 너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하여 네가 지금 비에 젖고 있음은 더더욱
너만의 문제가 아니다.
네 꽃은 이제
까닭모를 그리움의 배경 속에
젖을 대로 젖어
타인의 가슴 속 깊이 아무렇게나 번지고 싶은
한 사내의
자줏빛 진한 그리움의 빛깔일 뿐
진실로
진실로
젖어도 지워지지 않는
한 사내의 무참한 그리움의 빛깔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