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충만 시

설해목 - 곽재구

하동댁 2018. 2. 15. 13:45





[  무등산 중봉가는길에 소나무  ]




만다라를 읽다가

설해목이라는 단어 하나를 만납니다

雪害木이라 써야 할지 雪邂木이라 써야 할지

잠시 망설여도 보지만

난 금세 그것들에는 흥미를 잃습니다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이겠지요

내가 사는 강변에서

당신이 사는 그곳까지

눈은 순은의 길을 만들어줄 것입니다

핍진한 영혼들의 그늘 위에

펑펑 하늘의 말씀이 쌓이고

더러는 화석처럼

잊혀진 옛 기억의 꽃무늬를

들판 곳곳에 새기기도 할 것입니다

진눈깨비 몰아치는 닷새 장터에서

장국밥에 소주 한 병 말아 치우는

한 사내의 가슴팍을 서럽게 하기도 하고

그 사내의 깎인 머리와 바랑 위에

한줌의 따뜻한 솜을 얹어놓기도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눈 내리는 날이면

내 마음의 설해목 숲 끝 어딘가에

등불 하나 밝혀져 있을 것입니다

항아리 속 촛불처럼

은은하게 타오르는 한 나라가 있을 것입니다.

 

 

출처: 곽재구 시집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