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충만 시

문정희 시인의 쓸쓸

하동댁 2017. 11. 22. 20:54

 

 

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 삭풍의 감촉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겨울 빗소리

사방을 크게 둘러보아도 내 허리를 감싸 주는 것은

오직 이것 뿐이네

우적 우적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식어버린 커피를 괜히 홀짝거릴 때에도

목구멍에  오롯이 넘어가는 쓸쓸 !

손글씨로  써 보내 산이 두 개나 위로 겹쳐있고

그 아래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단아한 적막강산의 구도 !

길을 걸으면 마른 가지 흔들리듯 다가드는

수많은 쓸쓸을  만나네

사람들의 옷깃에 검불처럼 얹혀 있는 쓸쓸을

손으로 살며시 떼어 주기도 하네

 

지상에 밤이 오면 그에게 술 한 잔을 권할 때도 있네

그리고 옷을 벗고 무념의 이불 속에

알몸을 넣으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끌어안는  뜨거운 쓸쓸

 

 <다산의 처녀 >  민음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