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충만 시 [스크랩] 멍/박형준/(낭송:단이) 하동댁 2017. 3. 22. 23:24 멍 박형준 어머니는 젊은 날 동백을 보지 못하셨다 땡볕에 잘 말린 고추를 빻아 섬으로 장사 떠나셨던 어머니 함지박에 고춧가루를 이고 여름에 떠나셨던 어머니는 가을이 되어 돌아오셨다 월남치마에서 파도가 서걱거렸다 우리는 옴팍집에서 기와집으로 이사를 갔다 해당화 한그루가 마당 한쪽에 자리잡은 건 그 무렵이었다 어머니가 섬으로 떠나고 해당화꽃은 가을까지 꽃이 말라비틀어진 자리에 빨간 멍을 간직했다 나는 공동우물가에서 저녁해가 지고 한참을 떠 있는 잔광 속에서 서성거렸다 어머니는 고춧가루를 다 팔고 빈 함지박에 달무리 지는 밤길을 이고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이제 팔순이 되셨다 어느날 새벽에 소녀처럼 들떠서 전화를 하셨다 사흘이 지나 활짝 핀 해당화 옆에서 웃고 있는 어머니 사진이 도착했다 어머니는 한번도 동백을 보지 못하셨다 심장이 고춧가루처럼 타버려 소닷가루 아홉 말을 잡수신 어머니 목을 뚝뚝 부러뜨리며 지는 그런 삶을 몰랐다 밑뿌리부터 환하게 핀 해당화꽃으로 언제나 지고 나서도 빨간 멍자국을 간직했다 어머니는 기다림을 내게 물려주셨다 ㅡ시집『춤』(창비, 2005) 출처 : 한밭대평생교육원시낭송아카데미글쓴이 : 권교수 원글보기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