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봄이 오는 길목에서
어제는 제주 올레 2코스를 걸었습니다.
조류인플루엔자(AI)로 통제된 구간은 못 가고
나머지 구간 14km를 혼자 걸으며
봄이 오는 길목을 서성거렸습니다.
눈 내리고 추웠던 이틀 전에는
눈밭에서 뒹굴었는데,
아무튼 제주는 날씨가 변화무쌍한 곳입니다.
그곳의 매화는 거의 사그라지고 있고
동백꽃은 추위에 끝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파랗고
하얀 구름이 흐르는 것이
봄 날씨가 아니라고는 못하겠더군요.
구름을 벗 삼아 걷는다는 말
처음으로 느끼며 걸었습니다.
♧ 봄이 오는 길목에서 - 이희숙
살아서 외로웠던 사람
더는 외롭지 말라고
선물처럼 두고 온 서향 한 그루에서
죽어서 더 그리운 사람들이
별꽃처럼 피었다는 소식이
안부처럼 들려
반가운 마음에
천 리를 걸어서도 만나고 싶은
이름들에 편지를 씁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오랜만의 안부가 마음에 걸려
정작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서향 꽃잎에 묻어둔 채
안녕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그곳도 봄인가요? 라고 고쳐 썼다. 지우고
살아서 외로웠던 사람에게 라고 써서
봄이 오는 길목에서
성급하게 건져 올린 소식들을 띄웁니다
♧ 봄이 오는 길목에서 - 나상국
겨우내 돌아앉아 눈감고
동안거에 든 노스님처럼
세상을 등진 채
눕지도 못하고
까치발 발돋움하여 선 겨울나무
먼발치 끝으로
강 몸 푸는 소리 들리고
굽은 낙타 등 닮은 산등성이
쌓인 잔설이 남녘 바다에서
불어온 치맛바람에
안기어 스르르 녹아 내린다
산은 산대로
들은 들대로
강은 강 스스로
봄이 오고 있음을 안다
봄이 오는 길목에 서서
귀 기울인다
눈감고 보이지 않는 소리에
저마다의 가슴을 열고
새들도 나뭇가지 위에 앉아
흔들리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여
벌 나비 날아오를 날들의
물오르는 봄이 오고 있음을
알고 있다
머지않아 꽃피울 봄을
♧ 봄이 오는 길목에서 - 반기룡
고샅 고샅 둘러보니
분탕질한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느티나무
싱싱했던 푸르름을
한동안 저당 잡히고
눈꽃 속에 사뿐 젖어
동안거 하는 스님처럼
널따란 묵언수행 하고 있었네
담장의 흙내음은
곤한 동면에 허덕이다
봄비가 사부랑삽작 애무를 하면
진한 황톳물 뿌리며 사뿐사뿐 흐르겠네
남산에 숨어있던
산꿩 산토끼 노루 고란이도
긴장되었던 한숨을 단말마처럼 몰아쉬며
헐떡거리며 달려오겠네
달려오는 발자욱 소리에 화들짝 놀라
얽히고설켰던 뿌리는
외마디 신음소리 내며
고개 내미는 연습에 신명나겠네
물관마다 수액이
퉁퉁 불기 시작한
진짜 달래면 줄 것 같은 진달래는
환장하게 세련된 자태로 무장무장 걸어오시겠네
저기 저 아지랑이와 어깨를 맞대고…
♧ 봄이 오는 길목 - 진상록
흙들이 들풀처럼 일어서고 있다
천군만마 대군을 이끄는 선봉장은 봄이다
봄을 응원하는 바람들 저마다 아우성이다
푸른 스카프 바람에 휘리리 날리며
들판을 달려 언덕을 넘고 산을 오른다
음지를 찾아 기어 들어가는 겨울의 찌꺼기
승기를 잡은 봄에 저항 한번 하지 못한 채
무릎 꿇고 두 손 들어 항복한다
대지 위엔 봄이 이끈 백성들 한데 뭉쳐
기쁨에 젖은 눈물 찬란한 꽃으로 피고 있다
저 들녘에
저 언덕에
아득히 보이는 저 산 위에
♧ 봄이 오는 길목에서 - 김덕성
시리도록 빛나는
아침 햇살처럼 띠가 없는
맑고 환한 웃음을
그대에게 선물로 보내고 싶습니다
사랑스럽게 윙크하는 봄꽃처럼
화사한 얼굴로
아름다운 향기를
가슴에 담아 보내고 싶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뜨거운 삶의 에너지를
그대로 인해 충전되어
행복을 얻었기에
행복을 마음에 새겨 전하고 싶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나의 존재를 사랑으로 알았기에
그대에게
죽도록 사랑하겠노라고
훈훈한 봄바람에
이 한마디를 실려 보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