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충만 시

[스크랩] 김윤숙 시선집 `봄은 집을 멀리 돌아가게 하고`

하동댁 2017. 2. 10. 14:00


남천

 

그만 내려놓으라고 네게 연신 되뇌지만

 

저 성성한 남쪽 하늘 차마 놓을 수 없던

 

눈가의 번지는 눈물, 이내 붉게 맺혔네

 

모퉁이를 돌아서면 한생의 그 흔적들

 

바람 타 흩어지는 꽃잎처럼 속수무책

 

마른 몸 기도 품었듯, 기척 없이 새순 돋네

 

        

 

용담꽃

 

가을이 깊을수록 짙푸른 쪽빛이여

 

따라비 하늘 향해 왈칵 눈물 쏟아내면

 

저 들길,

 

오름 등성이에

 

별빛으로 남으리


        

 

 

멀구슬나무

 

네 안의

그 그리움

언제 다 쏟아냈는지

차마 길 못 찾을까, 몇 날 밤을 새웠나

십일월, 쌓인 낙엽들

노을처럼 붉었다

 

한때는

그늘이었던

집 울타리 멀구슬나무

태풍에도 휘지 않던 그 약속 그 여름을

비로소 다 놓았다며,

허공에 몸을 맡긴다


    

 

 

가을 저수지

 

그 누가 저 땅에 물을 가둬 놓았나

제방 위 빙빙 돌다 멀어진 고추잠자리

둑 아래 몇 채 남은 집 텅 비어 바람 든다

 

가을볕에 바래가는 새하얀 쑥부쟁이

바람에 흔들려도 물빛에 내려서는

물가의 산 그림자 따라, 또 내리는 하늘


        

 

따라비오름 억새꽃

 

가시덤불 골짜기 헤쳐 간 눈앞으로

그가 보낸 답신이듯 오름 등성 억새무리

 

응축된 문장을 풀었다,

 

일렁이는 눈물! 저 눈물!


      

    

 

한라돌쩌귀

 

삼각봉

 

능선에서도

 

바람의 말

 

귀 안 기울던

 

보랏빛 투구모자

 

눈물 그렁 사내여

 

한번쯤

 

저잣거리의

 

가을볕에 내리고픈


    

 

 

따개비, 따개비여

 

하늘 비친 물빛을 함부로 못 거두는

 

비양도 갯바위

해국으로 핀 따개비

 

뭍에서 흘러 든 발걸음

서둘러 부여잡네

 

그 어떤 간절함에 섬은 또 꽃을 피우나

 

비릿한 순정으로

한사코 나를 붙잡아

 

울음을 다 내려놓네

 

이쯤서 멎은 가을

 

 

   *김윤숙 시선집 봄은 집을 멀리 돌아가게 하고

                   (현대시조 100인선 21, 2016.)에서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