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김윤숙 시선집 `봄은 집을 멀리 돌아가게 하고`
♧ 남천
그만 내려놓으라고 네게 연신 되뇌지만
저 성성한 남쪽 하늘 차마 놓을 수 없던
눈가의 번지는 눈물, 이내 붉게 맺혔네
모퉁이를 돌아서면 한생의 그 흔적들
바람 타 흩어지는 꽃잎처럼 속수무책
마른 몸 기도 품었듯, 기척 없이 새순 돋네
♧ 용담꽃
가을이 깊을수록 짙푸른 쪽빛이여
따라비 하늘 향해 왈칵 눈물 쏟아내면
저 들길,
오름 등성이에
별빛으로 남으리
♧ 멀구슬나무
네 안의
그 그리움
언제 다 쏟아냈는지
차마 길 못 찾을까, 몇 날 밤을 새웠나
십일월, 쌓인 낙엽들
노을처럼 붉었다
한때는
그늘이었던
집 울타리 멀구슬나무
태풍에도 휘지 않던 그 약속 그 여름을
비로소 다 놓았다며,
허공에 몸을 맡긴다
♧ 가을 저수지
그 누가 저 땅에 물을 가둬 놓았나
제방 위 빙빙 돌다 멀어진 고추잠자리
둑 아래 몇 채 남은 집 텅 비어 바람 든다
가을볕에 바래가는 새하얀 쑥부쟁이
바람에 흔들려도 물빛에 내려서는
물가의 산 그림자 따라, 또 내리는 하늘
♧ 따라비오름 억새꽃
가시덤불 골짜기 헤쳐 간 눈앞으로
그가 보낸 답신이듯 오름 등성 억새무리
응축된 문장을 풀었다,
일렁이는 눈물! 저 눈물!
♧ 한라돌쩌귀
삼각봉
능선에서도
바람의 말
귀 안 기울던
보랏빛 투구모자
눈물 그렁 사내여
한번쯤
저잣거리의
가을볕에 내리고픈
♧ 따개비, 따개비여
하늘 비친 물빛을 함부로 못 거두는
비양도 갯바위
해국으로 핀 따개비
뭍에서 흘러 든 발걸음
서둘러 부여잡네
그 어떤 간절함에 섬은 또 꽃을 피우나
비릿한 순정으로
한사코 나를 붙잡아
울음을 다 내려놓네
이쯤서 멎은 가을
*김윤숙 시선집 ‘봄은 집을 멀리 돌아가게 하고’
(현대시조 100인선 21, 201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