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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조선DB / 일러스트=이철원 |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여름으로 인하여 문득 찾아 온 가을이 놀랍고 반가웠다. 하지만 또한 입시철이 다가오고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오는 이 가을의 수능과 입시는 곧 이 땅의 여러 가정에 끝 모를 근심과 희망과 환희를 낳을 것이다.
여기 하나의 시선이 있다. <백록담>의 여섯 번째 시에는, 난생 처음 새끼를 낳노라 혼쭐이 빠진 막 돼먹은 어미가 등장한다. 산길 백 리를 달려 서귀포까지 도망친 이 철없는 어미는 돌아왔을까? 어미를 여읜 송아지가 울며불며 말을 보고도 매달리고, 등산객을 보고도 매달리는 이곳으로 어미는 다시 돌아왔을까? 애비 노릇이라곤 연습도 없이 매일 매일 낯선 상황을 겪고 있는 철없는 나도, 우리 새끼를 ‘모색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까 봐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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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또 하나의 시선이 있다. ‘다락같은 큰 말’에게 ‘검정 콩 푸렁 콩’을 주겠다며 슬퍼하지 말라는 기특하고 기특한 아이가 있다. 아이는 지금, 언제나 사람 편인 이 말은 왜 그리 슬픈지도 모르면서 달랜다. 망아지가 아니라 말을 달랜다. 참 그렇다. 말만이 아니라 우리 어른들은 때가 되면 누구나 ‘먼 데 달’을 보며 한숨을 짓기도 한다.
비평가 유종호 선생은 <백록담>의 ‘어미’를 기아(棄兒)공포증과 단명(短命)공포증에, <말>의 ‘화자’를 고아공포증과 부모상실공포증에 연결시키면서 정지용의 시편이 발표되었을 1940년대 전후 우리 사회의 평균 수명이 40세 전후였음을 적었다(≪시란 무엇인가≫, p.115).
누구나 자식이며, 대다수가 어버이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근심이 아니라 환희를,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실현되는 때가 오기를 바라는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