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청량사에서
오래전부터 봉화의 청량사가 너무 가고싶었다. 소개받은 산악회에서 청량사를 간다고 해서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무조건 따라나섰다. 힘들고 고단한 일상의 일들을 모두 잊고 오로지 신선한 바람
향긋한 꽃내음, 산사의 고요만 즐기다 오는거야 .....
길은 모두 추억이 된다. 그 추억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
낙동강 상류에 자리한 청량산을 조선시대의 주세붕은 『청량산록』이라는 기행문에서 다음과 같이 예찬하였다.
해동 여러 산 중에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밝으면서도 깨끗하며 비록 작기는 하지만 가까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청량산이다.
또한 주세붕보다 여섯 살 아래이며 이곳 예안이 고향인 퇴계 이황은 청량산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스스로 호를 ‘청량산인’이라 짓고 이렇게 노래하였다.
청량산 옥류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헌사하랴 못 믿을손 도화로다
도화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魚舟子) 알까 하노라
퇴계 이황이 청량산의 내청량사로 가는 길옆에 ‘오산당(吳山堂)’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남명 조식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황은 조식과 달리 벼슬길에 여러 차례 나갔다. 정치가라기보다 학자였기에 임금이 부르면 벼슬길에 나갔다가도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기를 몇 차례, 그동안에 풍기군수와 대사성 부제학과 좌찬성 벼슬에 올랐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귀향한 것이 68세였다. 이황은 도산서원을 마련하기 전까지 이곳에 집을 지어 ‘청량정사’라 이름 짓고 학문을 닦으며 후학을 가르쳤다.
또한 이산에는 신라 때의 명필 김생이 쓴 불경이 많다 옛날 한선비가 이절에서 글을 읽다가 불경 한권을 훔쳐 집에 왔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곧 염병에 결려 죽고 말았다. 그 가족이 두려워 하여 불경을 즉시 절에 돌려주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
오는 김생의 굴에도 가보고 싶었으나 시간상 가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사전에 인터넷을 찾아가면서 미리 조사를 해갔음에 도대체 어디가 어디인지 도통 알수가 없다.
사진 찍기에는 사람은 너무도 많고 .....
이곳은 평일날 인적이 드물때 이곳 저곳 구석구석 카메라 들이대고 찍으면서 여유자적 하면서
보내야 한다. 사람에 밀리고 .... 시간은 정해져있고 ......
이곳은 산행이 목적이다. 오로지 정상을 가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이다. 나도 그중 한회원으로 가입하였고
그러니 기본이 충실해야 한다. 오로지 산의 정상만을 향하여 한발 한발 내딛는거다.
산은 우리의 인생을 너무도 닮아 있다. 힘들게 오르면 어느덧 산들산들 산바람이 땀을 식혀주며
낮은 돌바닥에 앉아 한숨쉬고 다시 산에 오른다. 또다시 힘든 고갯길을 오른다. 오로지 올라가야만 하며 오르는 것은 삶이다. 내 삶에 충실해야 하드시 .... 또 한발 한발 산길을 오른다.
처음 참석이라 조금 어색하고 서먹서먹했지만
두오라버니 덕분에 한결 맘이 편안했습니다.
오라버니 다음 산행에도 저 은하수 꼭 챙겨주세요